Okinawa, JAPAN 2015. 02. 16 12:51
언제나 여행의 시작은 분 단위로 행선지를 정리한 엑셀파일 만들기였던 천하의 여행 계획왕. 그랬던 내가 완벽한 무계획으로, 쫓기듯 떠난 첫 여행지는 오키나와였다. 계획왕이기도 했지만 번아웃왕 또한 겸직하고 있기에, 다시 찾아온 번아웃을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해야 했다. 여태까지의 경험 상 번아웃 퇴치에 효과가 가장 좋았던 건 돌발행동이었다. 효과가 큰 만큼 후폭풍도 크지만, 내 안을 좀먹는 듯한 기분을 잽싸게 떨치는 데에는 늘 성공적이었다. 돌발행동 답게 여행메이트와 상의는 생략했다. 피치 못할 때만 탄다는 저가 항공사의 왕복 항공권을 덜컥 구매했다. 행선지는 오키나와 나하 국제공항. 말도 안되는 레그룸과 연착의 굴레가 우리는 피해갈 거란 근거없는 믿음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 만화에서 이국적인 외모로 사투리를 쓰는 쿨한 캐릭터의 고향, 지금은 은퇴한 일본의 슈퍼스타 아무로 나미에가 태어나 자란 곳, 제주도처럼 오래 독립 국가였기에 그들만의 문화와 생활 패턴이 있고 전쟁의 상흔이 깊은 곳. 이럴 수가. 그 때는 이 몇 문장도 만들 수 없는 오키나와 바보의 상태였는데 왜 이 곳을 여행지로 결정했을까. 이게 다 오쿠다 히데오 때문이다. 그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에서 괴짜 가족급의 주인공 가족이 이상향으로 품었던 곳이 오키나와였다. 당시에 난 ‘기회 보다가 남쪽으로 튀어야겠어.’ 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남쪽’도, ‘튀다.’도 모두 내 스타일이었으니. 우발적으로 선택한 여행지였으나, 그래도 아주 조금의 근거는 있는 셈이었다고 해두자.
여행지로서 오키나와의 미덕은 짧은 비행 시간에도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외딴 곳에 온 기분에 젖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과 조금 다르게 생긴 일본인, 그 일본인과도 조금 다르게 생긴 오키나와 사람들의 외모와 사투리가 주는 미묘한 균열감은 매력적이었다. 우미부도(바다포도 라는 의미), 고야 등 익숙지 않은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들은 개성 있는 외관에 비해 익숙한 맛을 담고 있어 친했나 안친했나 생각이 잘 안나는데 막상 대화하다 보니 친했던 동창을 만난 기분이었다. 패딩으로 감싸고 칼바람을 맞았던 서울의 2월과 달리 한 낮에도 바닷가에 발 담그고 참방일 수 있는 온화한 기후도 매력적이었고, 해태와 사자를 섞어놓은 모습으로 낮은 지붕에 앉아있는 오키나와의 수호신 시샤는 마음에 들어서 두어마리 데려와 냉장고 자석으로 우리집을 수호해주고 있다.
화산섬 특유의 성긴 풍경들은 묘하게 제주도를 닮은 이 곳. 기념할 만한 물건을 주섬주섬 챙겨오던 보통의 여행 때와 달리 이때의 난 터질듯한 상념의 일부를 놓고 왔다. 번아웃이 함께 몰고 온 알 수 없는 미움, 질투, 악에 받친 악다구니, 성난 얼굴. 반팔과 반바지로 훌렁 갈아입을 정도로 너그러웠던 이케이 바닷가의 산호 가루 백사장에 묻어두었다. 언젠가 지금보다 씩씩하고 강해지면 놓고 온 기억을 주섬주섬 담으러 다시 가야겠다. 태평양 깊은 곳으로 떠내려갔으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