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 입니다

상실에 대비해보려는(소용없겠지만) 딸의 이야기

by 홍지이


한 해 한 해 나이가 든다는 건 그리운 순간이 많아지는 것과 같은 걸까. 언젠가부터 낯선 오늘과는 어딘가 서먹하고, 어제와는 세상 정다운 듯 살고 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못마땅한데, 지난여름 바닷가에서 파도를 피하려 엉거주춤 서 있는 내 모습은 애틋하기만 하다. 지금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머뭇거리게 되면서, 한 때의 추억을 더듬을 때는 묘하게 안심이 된다. 어느새 '옛날에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즐기는 옛날 사람이 되어가는 건가. 낡은 모습 그대로 빛나고 있는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리며, 익숙해서 더욱 아늑한 그 기억 안에 옹송거린 채 충분히 머물고만 싶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나는' 대신 '우리는'이란 주어를 쓰는 어르신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빠는 요즘 모든 말의 시작을 '우리 때는 말이야'로 끊는데, 왜인지 그 문장이 사랑스럽다.) 술자리에서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래서 그 '우리'는 누구랑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라고 장난스레 묻기도 한다. 그들이 왜 우리를 소환하는지 어렴풋 알 것 같아 마음대로 생각해 봤는데, 말을 하며 소중한 이들이 잔뜩 떠올라서 그런 것 아닐까 싶다. 기억과 함께 따라오는 그 시절의 정다운 인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결국 그리운 사람과 애틋한 순간은 점점 많아지기 마련인가 보다.


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나이부터 '강아지를 기르고 싶다.'라고 말했던 듯 싶다. 피아노 학원에 가는 길, 아파트 상가 앞에 묶인 누렁이가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무서워했지만 난 어떻게든 그 애의 마음을 얻으려, 언젠간 꼬리 한번 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엄마 몰래 바지 주머니에 천하장사 소시지를 넣어가서 주곤 했다. 여전히 개를 사랑하고 비인간 동물을 염려하는 내가, 회사를 관둔 뒤 방치와 학대의 환경에 놓인 동물을 구조하는 동물보호 단체에서 봉사를 하며 나 죽고 너사네 하며 동동거리는 걸 알게 된 아빠. 어느 날 지나가듯 휙 던진 말씀이 내 마음에 콕 박혀있다.

우리 딸은 어릴 때도 그러더니 그렇게 작은 걸 아끼고 좋아해서 어쩌냐

그럼 슬플 일도 세상 많을 텐데


그 말을 듣고 속으로만 대답했다.


괜찮아요

작은 것을 돌보고 아끼고 애달파하는 아빠의 그 상냥한 마음 덕에 내가 이 세상에 왔는걸요.


사실 날 염려하는 아빠는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반려견 솔이(지금은 무지개다리 건너 새로운 여행을 떠났다)와 동네 어귀를 산책할 때마다 새들 주신다며 주머니에 쌀을 한 움큼 넣고 나가시곤 했다. 동네 강아지와 만나면 꼭 아는 척을 하고 말을 붙이고 건강하라는 덕담을 하신다.


올봄에 제주로 이주한 나를 보러 아빠와 엄마가 다녀 가셨다. 며칠 느긋하게 머무시다 다시 육지의 집으로 돌아가시던 밤. 밤비행기에서 바라본 제주 앞바다는 그날따라 파도가 잠잠했는지 배가 많이 나가 있었나 보다. 아빠는 밤을 밝히는 고깃배의 불빛이 너무 아름다웠다는 말씀과 함께 '모두 만선 해서 돌아가야 할 텐데.'를 오래 염려하셨단다. 밤바다에 뜬 불빛을 보며 모르는 배들의 만선을 기원하는 마음, 아무나 쉽게 품지 못할 귀한 상냥함임을 정작 당신만 모른다.


제주는 해가 지면 온 세상이 금세 깜깜해진다. 맞은편 차선에서 오던 차도 약속한 듯 순식간에 사라지기에, 가로등도 거의 없는 도로를 혼자 달릴 때가 많다. 서울의 밤은 오히려 낮보다 밝았다. '나만 바라봐' 달라는 각종 상점가와 차량의 불빛이 워낙 많아서, 때론 낮의 소음보다 밤의 조명을 더 요란스럽다 느꼈다. 제주에 와서야 진짜 어둠을 배웠다. 가로등이 있고 오가는 차량이 많은 편인 평화로를 타기 전까지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깊은 어둠과 닿아 살아 보니, 삶이 더 깊어진 기분이다. 어느 날, 어둠 속 삶의 흔적을 들여다보다 문득 생각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마도 난 고아가 될 것임을.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렇겠습니다.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과거를 되짚다 보면 자꾸만 말도 안 되게 젊고 반짝이며 활기 넘치는 아빠, 엄마와 마주쳐 이내 속상해진다. 그들이 갈아 넣은 젊음을 마시고 내가 자란 건 아니었을까. 올해 제주로 오며 결심한 게 있다. 엄마와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자는 거다. 생신이나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이 아니라 아무 날 아무 순간에 기습적으로 하기로. 나의 결심에 오그라들지 않기 위해 천명하듯 가족 단톡방에 밝혀버렸다. 아껴서 뭐 하나. 남편에게도, 반려견에게도, 친구에게도, 제자에게도 잘하는 그 말을 왜 아빠와 엄마에게 아껴온 것인가. 올봄에 우리의 제주집이 안전한가를 살피러 오셨을 때, 공항에 내려드리며 조심히 가시라며, 내가 두 분을 너무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눈이 동그래지셨다가, 이내 포근히 웃으셨다. 눈물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팡 터져 눈물을 흩뿌릴 것 같은 순간을 겨우겨우 참았다.


폭주하는 사랑 전도사가 된 김에 여름부터는 매일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용건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할 말이 많다. 아빠를 좋아하는 마음을 마구 뽐내보고 있다. 아빠는 뭔가 어색해하시는 듯했지만, 드디어 며칠 전에는 당신의 20대 군대 시절 이야기를 한참 하셨다. 남자들이란. 나는 그렇더라.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나면 가장 그리운 감각은 냄새, 그다음으로 그리운 게 목소리임을. 간직한 옷에 밴 냄새가 희미해질까 봐 지퍼백에 담아뒀다, 너무 보고 싶은 날엔 살짝 열어 틈에 코를 박고 킁킁거린 뒤 잽싸게 여미곤 했다. 그래도 서서히 사라진다. 내 냄새와 섞인 채 영원히 내 곁에 머무는 거란 생각을 쥐어짜 내 겨우 위안 삼았다. 요즘엔 우리 집 강아지의 배와 코, 발바닥 냄새를 자주 맡아둔다. 냄새는 지금, 여기에 함께 있음을 믿게 하는 감각같다. 그 다음 그리운 목소리. 목소리는 녹음이나 동영상으로 담을 수 있어 다행이다.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아빠와의 통화를 자동 녹음으로 설정 해놔야겠다. 운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므로, 과거를 응축한 수 많은 녹음은 고아가 된 어느 미래의 날, 나를 살게 하는 이유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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