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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취향 공동체 (1)

by 홍지이


패드와 블루투스 키보드의 배터리가 넉넉한 걸 체크한 뒤 레몬색 백팩에 챙겨 넣었다. 다행이다. 글쓰기를 위한 준비물이 단출하지 않았다면. 글을 쓰지 않으려 둘러대는 백 가지 핑계가 금세 백 한 가지로 늘었을 테니. 문득 흰 천과 바람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던 지후 선배(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캐릭터)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쓰기에 대한 로망이 고갈되어 그런가. 요즘 익숙한 공간에서는 글이 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백팩을 메고 집 밖으로 나선 뒤 글을 망망대해에 던져, 아니 띄워 놓는다. 자유롭게 유영하는 글의 뒤를 밟으며, 슬쩍 요행에 기대 보려고. 오늘의 낯선 정박지는 사장님과 눈인사를 하게 된, 조만간 단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될 것만 같은 카페다.


글 얹힘 현상을 겪지 않더라도, 주말에는 하루에 카페 두세 군데를 가기도 한다. 나의 카페 취향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메뉴의 맨 앞에 당당히 에스프레소가 위치한 곳이 좋다. 그런 곳은 블렌딩 원두를 제공하는 로스터리 카페일 가능성이 높기에. 커피 리스트와의 조화를 고민하여 직접 만든 디저트가 있으면 좋다. 잠시 머물며 글을 써야 한다면, 몇 가지를 조금 더 살피게 된다. 테이블이 서너 개 정도인 곳은 피한다. 30분 정도는 앉아서 딴짓을 해야 글발이 서는데, 손님이 오면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안절부절못하게 되어서다. 삐딱선 타는 글을 다듬을 때 직선이 주는 안정감에 기대기라도 해야 하므로, 이왕이면 반듯한 사각형 테이블이 좋다. 스피커의 자아가 비대해서 공간의 모든 빈틈을 노래가 가득 채우는 건 조금 괴롭다. 그럼에도 내적 흥을 유발하는 노동요는 필요하다. 만약 제이미 컬럼(Jamie Cullum)의 <Twentysomething> 앨범의 수록곡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지도 앱에 별을 꾹 박아 저장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저를 부하, 아니 단골로 받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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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에서 카페를 바라보며 내 차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길이 끝나는 곳, 저절로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한림 앞바다가 있다. 이 카페는 근처의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보았다. 거위의 목을 닮아 구즈넥 커피팟이라 불리는 주전자를 들고 커피를 내리는 뒷모습을 보고는, ‘핸드 드립을 하는구나. 럭키!’를 외쳤다. 바깥 입구에 ‘물 드세요.’를 써 붙인 빨간 보냉 물통도 봤다. 코팅된 물통의 곡선 부분에 맺힌 햇살처럼 무심하게 반짝이는 배려라니. 알고 보니 이곳은 아침 8시부터 열어 방황하는 아침형 인간을 품어주고, 반려동물 동반 가족도 환영해 주는, 카페계의 마더 테레사였다. 심지어 첫 방문 날 유재하의 노래 ‘지난날’이 귀에 감기기까지.


푹신한 소파 좌석에 앉아 있었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글의 갈무리를 잡아서, 내면에서는 풍악을 울리며 축제를 벌이는 중이었다. 주변 시야에 걸려 뿌옇게 처리가 되어있는 공간에 앉았던 행인 A가 입체감을 가지고 다가와, 나의 눈빛을 끌어가려 했다. 누구지?



"안녕하세요."

"아앗! 안녕하세요. 여긴 웬일이세요? “



(다음 편에 계속)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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