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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을 외치지 않은 도전도 유효한 삶 (2)

by 홍지이


전편

https://brunch.co.kr/@redmanteau/224


평생 토마토를 먹지 않던 나인데 어느 날,
제주의 한 카페에서 결심했다.
그것도 1초 만에.

‘그까짓 토마토, 그냥 먹자.‘라고.

함께 글쓰기 수업을 하는 학인 분과 동네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날의 메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베이글 샌드위치. 일행 분과 통통하고 거대한 샌드위치 하나를 반으로 커팅해 나눠 먹기로 했다. 일행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사실 주문할 때 알고 있었다. 우리가 고른 연어 크림치즈 베이글 샌드위치는 통밀 베이글과 연어, 크림치즈, 양파, 그리고 토마토! 끼리 몸을 맞대고 누워 있다는 것을.


셀프 코너에서 잽싸게 포크를 집어 와서 샌드위치 수술을 시작했다. 헤집어 놓은 음식을 보면 누가 좋을까. 일행이 오기 전에 어서 집도하여 절개 및 봉합까지 마쳐야 한다. 비록 수술 도구는 메스가 아니라 포크지만, 다년간의 수련으로 능숙하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 10초 컷 정도를 예상하던 찰나, 문득 토마토를 골라내는 삶의 너절함이 궁색해졌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까짓것 그냥 먹자.


'그냥 토마토를 먹자.'라는 결심이 1초 만에 섰던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청정 제주 전역의 오일장의 기운을 받아서라고. 갑자기 오일장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토마토를 먹을 결심은 제주에 살며 제철 채소가 가진 힘을 믿게 되었다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야 제주에서 첫 봄을 건너 여름을 맞은 초보 도민. 건강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섬과 농민 분들의 부지런한 손길이 길러낸 제주산 제철 채소로 한 끼 밥상을 차리는 재미에 푹 빠져 버렸다.


그리고 오일장을 가득 매운 상인 분들은 늘 옳았다. 장에 가서 채소 매대를 훑어보다 보면 그날의 대세를 이루는 채소가 눈에 들어온다. 그럼 그날은 그 채소들 위주로 산다. 그럼 실패를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도마 위에 오른 채소들의 단단한 몸체를 칼로 썰며 이미 느낀다. 올해의 햇살과 비를 맞아 잘 여물었구나. 새물로 꽉 찼는 데다 억세지 않고도 충분히 아삭하겠구나.


토마토와 오일장의 기운이 파이팅 넘치는 하이파이브를 하던 때. 주말 저녁이면 무한도전을 보며 각종 게임의 규칙을 섭렵한 예능 키즈는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토마토를 먹기 전에 내가 도전! 을 외쳤던가?'

무한도전 1회. 전설의 시작

TV 앞에 앉아 매주 남들의 도전을 봤던 나. 우연히 성공한 도전은 무효로 치고 한번 더를 외치던 예능 멤버들과 마음을 모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자고로 도전은 긴장되고 쫄리는 기운을 모아 해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절대 실패하지 않도록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 되었다 싶을 때, 비장하게 벼려온 마음에서 비롯해야 도전의 쓰임을 다 하는 것 아니었나.


다행히 삶은 예능 프로그램과 달랐다. '도전'이란 우렁찬 외침 대신, 오직 한 사람의 고요한 용기가 있었을 뿐이다. 토마토 먹기 도전, 하고 보니 별 거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될 일을 평생 미룰 뻔했다니. 하루아침에 성공한 도전을 방방곡곡 알렸다. 나의 토마토헤이터 역사를 잘 아는 오랜 지인들은 내게 토마토 슬레이어라며, 찐어른이 되었다며 함께 놀라워했다.


토마토 포비아는 이런 공포심도 있다. 오랫동안 마트 매대에 켜켜이 누워있는 토마토 더미가 무서웠다. 하지만 이젠 그 마음을 오므렸다. 그리곤 속으로 '훗 한 입 거리 짜식들 주제에 잘도 모여있네.'라고 생각해볼까 한다. ‘세계테마기행‘이나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같은 여행 다큐를 좋아하는데, 스페인의 발렌시아 지방의 축제 '라 토마티나' 영상을 볼 때면 함정 카드에 걸린 듯했다. 잘 익은 무른 토마토를 서로에게 던지고 밟고 깔고 앉아 으깨는 게 축제라니. 온몸에 토마토를 바른 사람들의 모습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공포영화 <캐리>에서 피를 뒤집어쓴 주인공의 모습만큼이나 무서웠다.


게다가 모든 공간을 채운 토마토의 맛과 향이라니! 만약 내가 저곳에 있었다면(아무도 가라고 한 적 없지만) 분명 얼굴을 타고 흘러 입으로 들어가는 토마토의 양이 못해도 1, 2개는 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 저곳에 가도(갈 생각도 없지만) 죽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생토마토는 못 먹는다. 베이글 샌드위치에 들어있던 토마토는 레몬즙이나 소금, 후추 등으로 마리네이드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생토마토를 먹게 될 때를 기다리겠다.


언젠가 또 오겠지. 도전을 외치지 않아도 유효한 도전을 할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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