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일부를 줄 테니 가져가서 가장 먼 곳에 뿌려줄래?

제주의 바람에게

by 홍지이

“오늘은 바람이 있는 날이네.”


제주살이 반년 차. 아침 첫 비행기로 서울에 가는 남편의 하늘길이 고될까 싶어 월요일 아침은 창 밖으로 나무의 몸 사위를 확인하며 바람의 흔적을 좇는다. 차를 타고 나와 평화로가 시내에 닿을 때쯤 되면 슬쩍 오른쪽으로 난 창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그곳에 한라산 자락이 있다. 산에 걸친 구름의 움직임이 둔하거나, 구름이 없어 산세가 또렷하게 보이는 날엔 어쩐지 안심이 된다. 오늘은 아무도 아침 하늘을 어지르지 않았구나. 누군지 모를 이에게 품은 고마움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백록담에게 대신 전하곤 한다.


바람이 오고 있어.
바람이 온다.
바람이 간다.
휴ㅡ 갔다.


‘바람이 분다’는 말이 어색해졌다. 그 대신 바람이 내 쪽으로 오고, 바람이 저쪽으로 갔다는 표현이 입에 붙었다. 이 섬에 사는 바람은 존재감이 대단하다. 아침엔 없지만 낮에는 올 수 있어, 혹은 오늘은 없지만 내일은 새벽부터 널 찾아올 거야. 이렇게 늘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군다. 나는 그런 바람이 갑자기 와도 놀라지 않으려, 하루의 구석구석에 바람을 들일 공간을 마련하곤 한다. 이곳에 사니 오가다 자주 만나서, 그래서 정이 들은 셈 치기로 했다.


바람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언제든 올 수 있더라. 반려견 무늬와 집 근처에 있는 항몽 유적지로 산책을 가면, 문득 가만히 서 있어 본다. 그럼 들린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바람의 발걸음 소리가. 발걸음보다는 얇은 옷을 지치는 듯 가볍고도 자유로운, 그러면서 어딘가 분명 간지러워질 것 같은 소리가.


먼 곳에 있는 나무의 잎사귀를 훑으며 다가온 바람은, 서서히 오는 듯싶다가도 금세 나의 정수리에 걸터앉는다. 머리카락을 지치며 건네는 바람의 가볍거나 묵직한 인사에 답하려 하면, 이미 가고 없다. 나의 일부를 줄 테니 가져가. 네가 갈 수 있는 가장 먼바다에 뿌려줄래?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그 말을 들으면 바람은 분명 그렇게 쉬운 일을 부탁이라고 하냐며 흔쾌히 해줄 것 같다. 쿨하고 어른스럽게.

손바닥이 하늘을 보게 펼쳐서 손가락 사이에 바람을 걸어봤다. 며칠 전 그 바람일까. 나보다 한껏 어른 같던 그 바람을 다시 만난 것 같을 때도 있다. 저 멀리 알 수 없는 나라의 음식 냄새를 품고 온 걸 보면 제법 근사한 여행을 하고 온 것 같던데.



바람이 나타나면 나무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흔들렸다. 아니 저마다의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해야 옳을까. 만약에 바람이 어떤 종류의 고통의 모습과 닮았다면, 바람을 맞는 나무는 고통을 알게 된 사람과 비슷해 보였다. 고통과 맞닥뜨린 어떤 이는 아이고 나 죽겠다 하고 온몸으로 신음하고, 어떤 이는 고요히 감내한다. 바람이 거센 날은 나무뿐 아니라 도로의 표지판도, 신호등도, 식당 앞 입간판도, 전신주도 모두 흔들리고 있다. 잔뜩 힘을 주고 버티고 있는 걸 보는 날엔, 마음속의 큰 목소리로 응원하며 걷는다.


모두 힘내! 각자의 방식으로 이 바람을 잘 버틴 뒤 내일 아침 다시 만나자.


오늘 밤은 침대방 이중창의 안쪽 창까지 흔들린다. 창을 두들기는 바람 소리와 심장 박동을 맞춰 본다. 그 일에 몰두하면 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자잘한 걱정 나부랭이가 잠시나마 사라진다. 창에 닿은 바람의 소리는 둑 두둑 둑 두두둑. 오늘은 광안리 바닷가의 폭죽 소리처럼도 들린다. 이런, 오늘 밤은 기어이 바람들이 축제를 벌일 모양인가 보다. 잠보다 더 멀리 나아가지 않을 헛된 생각, 그야말로 꿈을 불러줄 몽상으로 생각의 길을 닫아 보련다. 바람과 얼마나 친해지면 오늘과 같은 축제의 밤에 날 초대해 주려나 따위의.

keyword
이전 05화도전! 을 외치지 않은 도전도 유효한 삶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