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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서로에게
구체적인 현재가 될 수 있을까

프롤로그

by 홍지이

안녕.


주말 부부는 그런 거더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절대 함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 아니면, '다녀왔어.' '어서 와.'라는 말을 나눠 갖지 못한다는 거. 혼자 있는 저녁, 누군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듣고는 그 짧은 순간에 안심과 반가움과 애틋함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품는다는 거.


네가 없는 제주집에 있을 때면, 가끔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리고 종종 후회해. 천장에 달린 형광등은 모든 공간을 안경 가게처럼 보이게 한다며, 그 특유의 집요한 밝음이 싫어 간접 조명 만으로 밤을 보내자고 설득했던 나의 고집을. 내가 만들어 놓은 빛의 질서가 지배하는 서울집은 혼자 살기엔 충분히 밝지 않을 것 같아. 군데군데 1인용으로 사용하면 아늑해 보이는 어둠의 얼룩이 있어 보여. 그럴 때 네가 달콤한 색을 취한 어둠의 손을 덥석 잡고는 그 영역에 오래 머물면 어쩌지. 어둠의 깊이를 확인해 보려 안으로 뛰어들고는 매일 어둠을 걸치고 있을까 걱정이 돼. 이곳 제주의 밤에 발을 담가 미드나잇 블루색에 온몸을 물들이고만 싶은 내가 그렇듯.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며 네가 내게 준 크리스마스 카드, 내가 보여준 적 있지? 내용은 평범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한 가지 인상적인 게 있어. 바로 글씨 자국. 얼마나 꾹꾹 눌러썼는지 안에 적은 글씨가 카드의 뒷면까지 선명히 남아있는 거야. 그때 연필을 쥐었던 12살 소년의 손은, 지금보다 훨씬 작고 연약했을 텐데. 글씨가 지나간 자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생각해. 그때의 넌 내게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연필 끝까지 힘을 실었을까. 그거 아니? 어른이 되어 나의 반려자가 된 넌, 아직도 카드와 편지 뒷면에 글씨 자국을 남기는 사람이야. 나는 그걸 좋아해.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 진심이 지나간 길이라 흔적이 남는다고 생각하거든.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십 년에 걸쳐 너에게 온 손 편지는 빠짐없이 잘 모아두고 있어. 너의 글씨를 담은 종이라면 작은 쪽지까지도 다. 우리가 이사를 할 때마다 한 곳에서 쏟아져 나왔던 수상한 신발 상자, 세월이 느껴지는 틴케이스, 사연이 있는듯한 빛바랜 선물함은 모두 묵직한 진심을 담고 있어. 빼곡히 담겨있는 오래된 말들. 어디에 있어도 내가 나일 수 있게 날 지탱해 주는 너와 나의 뼈대들.


나는 너와 진짜 사랑을 하고 싶어. 아니다. 어쩌면 내가 그린 사랑은 진짜가 아닐지도 모르겠어. 아직 이 세상에 없는 것 같거든. 이 말은 너와 나누고픈 사랑의 태도가, 규모가, 행세가, 거창하다는 뜻은 아니야. 우린 언제나 우리만의 삶을 질서를 만들곤 하잖아. 주말 부부가 되었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우리 앞에 우려와 걱정의 말을 놓고 갔었지. 이 말들은 살짝 미뤄두고 우리에게 어울리는 언어를 포개보는 게 어때? 월요일에서 금요일. 우리가 떨어져 있는 시간을, 단어로, 편지로, 마음으로 연결해 보자.


우린 서로에게 구체적인 현재가 될 수 있어.

나의 현재가 되어줄래?





제주에 살며, 시인이 되고 싶은 에세이스트 아내

서울에 살며, 소설가가 되고 싶은 회사원 남편


이 글은 주말 부부의 단어 돌려 쓰기 기록의 첫 시작입니다.

시작, 행복, 가족, 그리고 모든 것.


우리 부부에게 애틋한 단어를 모아 서로가 잔뜩 묻어있는 글을 모아보려 합니다.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붕대 감기』, 윤이형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https://brunch.co.kr/@mag-in/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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