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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던 이 행복

행복

by 홍지이



남편 미립과는 뭐든 함께 하는 사이다. 우리는 서로의 일정에 키링처럼 매달려 다닌다. 누군가 밖에서 두어 시간가량의 일정이 있으면 남은 사람은 근처 카페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다, 일정이 끝나면 합류한다. 남편이 머리를 손질하러 가면 난 쭐레쭐레 따라가 대기 공간에 앉아 책을 읽는다. 내가 어린 친구(교사 시절 연을 쌓은 제자들)들과 한잔 하는 날엔 남편이 날 데리러 온다. 남편은 술자리에 잠시 합류했다가 일어나는데, 제자들끼리 편히 놀고 나는 빠지는 것에 적당한 핑계가 되어준다.


이런 우리가 주말 부부가 되다니.
나는 제주에서, 남편은 서울에서 평일을 보낸 지 어느덧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며칠 전 밤이었다. 침대에 누워 하루의 조각을 매만지고 있었다. 어딘 가에서 초가을의 마른바람이 새어들었다. 조각들을 촘촘히 기워냈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종종걸음으로 한여름 뜨거운 제주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바삐 살았는데. 이 헛헛함은 무엇일까. 나의 거대한 키링남의 마음도 나처럼 다른 계절에 머물고 있으려나. 혹시 마음에 바람길이 났다면 어떻게 살피고 있을까. 당장 영상통화를 걸고 싶은데 시간이 늦었다. 생각난 것을 바로 말할 수 없고, 자고 일어나면 이야기를 삼켜 마음에 쌓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우리 부부의 모습이구나 싶었다.


서로의 일상에 초대하고 기꺼이 참여해 영원히 대화할 수 있는 부부, 그게 우리였다. 나는 신체에 비해 생각이 더디게 늙는 편이고, 남편은 자못 진중해 보이지만 머릿속은 명랑한 사람이었다(둘 다 철이 없다는 뜻이다.). 동시에 우리는 공상가이기도 했다. 영화, 책, 드라마,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를 편식 없이 습득하고 닥치는 대로 공상의 질료로 사용했다. 물론 진지한 대화도 나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상대에게 이상한 질문을 내밀고 유쾌한 답을 듣거나, 우리만의 웃음 코드를 삽입한 유행어를 암호처럼 주고받았다.


실없는 웃음을 마주 나누면, 얼굴에도 마음에도 이내 행복이 번졌다.

그래, 행복이다. 대화가 그리운 나에게 급히 행복을 처방해야 했다. 늘 내 편인 책에 귀의해 보려 기억을 더듬었다. 20대 시절 깊숙이 품고 다녔던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의 명제를 꿔 오기로 했다. 하지만 ‘훌륭한 책들은 모두 지루한 부분이 있고, 위대한 삶에도 재미없는 시기가 있다.’는 구절을 읽고는 책을 덮었다. 지금 나의 몰캉몰캉한 정신 상태로는 행복을 정복하기란 버겁지 싶었다.


재빨리 다른 책을 떠올렸다. 드래곤볼! 왜 러셀에서 만화 드래곤볼로 튄 걸까. (드래곤볼에 ‘셀’이라는 빌런이 나오긴 하지만.) 주인공 손오공이 전투에서 지쳤을 때 사용하는 기술이 떠올랐다. 삶에서 만난 모든 생명체에게 기운을 빌려오는 비장의 기술, 원기옥. 엄청난 적과 대적할 때 모두에게 조금씩 빌린 에너지로 커다란 구를 만들어내 위기를 극복한 손오공처럼, 나도 행복한 기억을 끌어모아 행복의 원기옥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나의 행복한 순간은,



저녁밥을 먹고 소화할 겸 남편과 반려견과 공원을 산책하는데, 차례로 켜지는 가로등을 보게 되었을 때. 언제나 붐비는 테헤란로를 운전하는데 신호운이 좋아 연이은 초록불 세례를 받으며 통과할 때.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에 생각보다 별이 많을 때. 생각 없이 건넨 농담을 들은 남편이 바람 빠지듯 피식하고 웃을 때. 처음 간 카페에서 비건 라테 옵션을 제공할 때. 늦은 귀가라 주차 걱정을 하며 들어선 주차장에 가장 좋아하는 자리가 남아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맛집에 데려간 지인이 나보다 더 맛있게 먹을 때. 새로 산 접시 바닥에 붙어있는 바코드 스티커가 깔끔하게 떨어질 때. 여행지에서 급히 고른 숙소 테라스의 전망이 생각보다 너무 근사할 때.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잠든 남편의 모습을 몰래 촬영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또 몰래 볼 때. 아주 짧은 흰머리를 족집게로 단번에 뽑았을 때. 우연히 만난 지인을 차에 태우고 행선지에 내려 줄 때. 처음 본 사람과 ‘좋은 하루 되세요’란 말을 주고받을 때. 도서관에 마침 빌리고 싶은 책이 다 ‘대출 가능’ 일 때. 주량을 넘게 마셔도 취하지 않을 때. 저물녘 제주 서쪽의 해안 도로를 달리며 해를 따라잡는 기분이 들 때.


두서없이 써 봤는데 앞의 문장이 다음 문장의 손을 잡고 끌어내듯 연이어 나왔다. 남편이 등장하는 장면이 많았다. 사실 모든 순간에 남편이 있었다. 이 문장이 탄생한 순간을 지나칠 때마다, 아마 난 남편과 대화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우리는 서로의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던 이 행복을 반으로 쪼개 둘이 나눠 가졌을 테다. 쌓아 올린 문장의 꼭대기에 오르니 남편과 함께 지나쳐온 시간을 부감하듯 바라볼 수 있었다. 썩 마음에 드는 문장도 갖게 되었다.


행복이란,
즐거운 순간을 짧은 글로 적을 때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 붙일 수 있는 것.



주말에 온 남편에게 이 글을 보여주면 그가 어떤 농담을 만들어낼지.

이번엔 내가 바람 빠지듯 피식 웃을 차례일 것만 같다.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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