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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족

by 홍지이



"장인어른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아빠’인 게 너무 좋으신 가봐."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아, 내게도 몇 번이나 '아빠가 해줄게.'라고 하시더라고."


신혼 초기, 가족과 함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새로 얻은 장인어른이라는 호칭이 일껏 오래간만이라 낯설기도 했을 테지. 연애 시절에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을 '그 자식'이라는 건조한 호칭으로 불렀던 아빠였는데, 가족이 되니 순식간에 다정해지셨다. 그 시절 언젠가 데이트를 마치고 들어온 나를 보고는, 대뜸 저녁으로 뭘 먹었냐는 질문을 하셨다. 대충 햄버거 따위를 먹었다고 대답하자, '그 자식은 무슨 밥 같지도 않은 걸 사주냐.'라고 하셨다. 몇 번인가 곁에서 듣고 계시던 엄마가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왜 그렇게 부르냐 타박하셨지만, 그 이후 내 남편은 꽤 오랫동안 '그 자식'이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다. 아빠는 우리 모두가 그렇듯 장인어른, 사장님, 선생님, 형부, 작은 아빠, 이모부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나의 아빠가 어떤 사람인가. 아빠는 멋지고 으리으리한 이름을 앞세우면 좋은 순간마저, 늘 아빠라는 이름을 맨 앞에 두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다. 결혼 전에 교회 주일학교 강사를 했다는 선생님 아빠, 차범근과 동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축구 선수를 꿈꾸던 운동꿈나무 아빠, 학창 시절 학급에서 싸움도 잘 하고 공부도 잘해서 늘 임원을 도맡았다는(아빠피셜) 반장 아빠. 종종 듣는 이야기지만 나의 상상력은 나아가다 멈춘다. 아빠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아빠였던 것 같아서.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서른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나이는 끝자리가 같다. 내 나이를 세어 볼 때 아빠의 연세를 떠올리는 게 어렵지 않다. 아빠는 이제 밖에서 만나는 모두가 자연스레 어르신으로 대할 법한 외모와 연세가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빈 자리가 있으면 나와 언니가 앉기를 바라시고, 무거운 걸 옮길 때도 당신이 하시려 한다. 언니와 나, 그리고 엄마에게는 그래, 알았어, 응, 내가 해줄게 뿐이다. 마치 거절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무한히 긍정하는 예스맨이 되신다. 그에게 배운 언어는 늘 기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모습을 닮았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 알았어, 응, 내가 해줄게 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 진한 사랑의 언어임을.


제주에서 처음으로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게 되었다. 주택살이가 처음이라 무엇보다 마당 관리에 젬병이었다. 잠시 방심하다 하루 이틀 비가 오면 순식간에 작은 마당은 아열대의 맹그로브숲으로 변했다. 마침 우리들의 제주 집에 머물러 오셨던 아빠가 며칠을 지켜보시다 결국, 마당을 정리해주시겠다고 나섰다. 조금 하시겠단 정리는 허술하게 갖춘 도구였음에도, 건물을 빙 둘러 촘촘히 포위했던 무릎 높이의 풀들을 깔끔하게 베어 내셨다.


"아이, 아빠 놀러 오셔서는 왜 일을 하고 그러셔요. 내가 할게요"
"아니야. 아빠가 해줄게."



아빠는 육지로 가셨고, 비는 또 내렸고 풀들은 또 자랐다.

무릎을 넘어 금세 허벅지까지 오려나 싶은 풀을 보고 심란해하자, 이번에는 주말에 제주에 온 남편이 내게 말했다.


"그냥 두어. 내가 할게."


남편은 주말에 오면 마당의 잔디를 정리하고, 주차장 옆 우편함을 체크하고 야외용 벌레 퇴치제를 뿌린다. 몇 번인가 해보려던 내가 야생의 벌레에 소스라치게 놀란 이후부터 당연한 듯 그 일을 맡아서 한다. 남편 역시 풀을 베거나 벌레를 치우는 일은 낯선 도시 남자인데, 나를 위해 잘 몰라도 하는 거겠지. 그런데 주말 부부가 되고서야 알아차렸다. 아빠의 '아빠가 해줄게.'와 남편의 '내가 할게'는 쌍둥이 처럼 닮은 말이었다는 것을. 남편은 연애 할 때도, 결혼을 해서도 꾸준히 '내가 할게.' 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때 어렴풋 느꼈다. 남편은 아빠랑 닮았구나. 나는 이 자식(아빠식 표현으로ㅎㅎㅎ)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내가 할게.'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고백을 받는 기분이다. 아, 맞다. 아빠에게 배운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아끼는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려 나서는 마음에서 나온 말, 이를 테면 '그래, 알았어, 응, 그리고 내가 할게'는 모두 다 사랑의 언어라는 걸. 주말에 남편이 오면 내게 '내가 할게'라는 말을 하기를 기다려야겠다. 그리고 나도 고마워나 사랑해 보다 더 참신하게 다정한 말로 돌려줘야지.


[커플북] 주말부부는 그 뭐냐, 그거다. 서울편 - 남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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