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경기도 수원시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미성숙한 유년의 기억이 곳곳에 잔뜩 묻은 곳이라, 내게 ‘나의 동네’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도시는 수원뿐이다. 얼마 전, 그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아파트 단지가 재개발이 된다고 하여 다 허물기 전에 다녀왔다. 내가 살던 동은 졸업한 초등학교 담벼락과 맞닿아 있었다. 몇 번이나 덧칠했을지 모를 초등학교의 담벼락. 그곳엔 언제나 누군가가 바보나 똥개가 되어야 했던 유치한 낙서가 있었다. 번갈아 그 낙서의 주인공이 되었던 나와 친구들은 아마 대부분 이곳을 떠나 최선을 다해 바보똥개보단 나은 척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역마살‘ 이란 단어를 본 날,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 그 단어의 온전한 주인이 되고 싶었다. 딸 둘을 안전하게 기르는 것에 혈안이 된 엄마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고 겁을 놓는 것으로 나와 언니의 행동반경에 제약을 걸었다. 하지만 추구미가 톰 소여, 콜럼버스 종류였던 난 내가 살던 주공 5단지 아파트의 개구멍을 섭렵하고 다녔다. 낮은 담을 훌쩍 넘어 바로 옆 4단지로, 그리고 서서히 1단지까지 야금야금 나아갔다. 처음엔 판옵티콘의 권위 높은 감시자 같던 엄마에게 늘 뒷덜미가 잡힌 채 집에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며 길 건너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후엔 10차선 산업도로를 오가는 83-1번 버스만큼 세상이 넓어졌다. 중학교 때는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서 겁이 나기 전까지 가 보고 길을 건너 같은 버스를 타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요람 같은 5단지를 벗어나는 건 생을 건 아주 큰 모험이었다. 두려웠던 것 같다. 그렇게 작은 모험과 실패라도 하지 않으면, 마치 동네의 신호등처럼 한 자리에 박혀 살게 될까 봐.
남편은 5단지와 이웃한 주공 4단지 아파트에 살던 아이였다.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의 같은 반에서 5,6 학년을 보냈다. 함께 아는 친구가 많았고 다니던 학원도, 단골 분식집도 겹쳤다. 작은 동네이니만큼 입에서 입을 타고 서로의 소식을 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슷한 교복을 입고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 첫사랑과 첫 이별을 겪은 나이도 비슷했다. 비슷한 생의 반경을 돌며 따로 또 같이 한 동네의 풍경을 마음에 품은 어른이 되었다. 대학에 가면서 약속한 듯 나란히 수원시를 벗어났다.
서울 구석구석을 수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튼튼한 두 다리와 도시의 혈관처럼 뻗어있는 지하철 노선, 지선/간선 버스들의 조력을 받았다. 한강을 사이에 둔 땅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널 때마다 응원을 받았다. 더 멀리 갈 수 있어. 더 멀리 가보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며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서울에 살았다. 최선을 다해 서울에 붙어 있어야 했다. 20대 중반을 넘어서며 사회인이라는 옷이 어색하지 않을 즈음, 어떤 흐릿한 결심이 점차 형태를 만들어 갔다. 그것은 억눌러온 역마살에 대한 잊힌 감각의 재림이었다. 부유하지 않은 집안이라 밥벌이를 놓칠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던 과거가 눈에 어렸다. 남들은 쉽게 갖는듯한 어학연수, 교환학생의 기회는 몇 번이나 손에 잡았다 놓아버렸다. 유학은 더더욱 꿈같은 일이었다.
지금 사는 여기, 이곳만 아니면 좋겠다.
자꾸만 먼 곳을 향해 뻗어나가던 장래희망이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닐 때. 더 이상 너그러운 소문에 둘러싸인 친구가 아닌, 남자친구가 된 남편을 만났다. 남편과 함께 살아온 곳, 살고픈 곳, 우리들의 동네를 이야기했다. 나는 중력을 되찾았다. 그제야 발을 땅에 붙이고 걷게 되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우리는 집 보다 집이 있는 동네의 풍경을 찾기 위해 서울을 누볐다. 그리고 마침내 찾은 집. 우리의 신혼집은 우리가 함께 졸업한 초등학교가 있던 아파트 단지와 꼭 닮아 있었다. 자주 바뀌지 않는 경비 아저씨, 아파트의 연식만큼이나 높게 자란 나무가 단지 곳곳에 그늘을 드리우는 곳, 오래된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곳.
나의 역마살 라이팅으로 우리는 결혼 후 잠시 해외에 가서 산 적도 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남편은 많이 힘들어했다. 장기적으로는 해외로의 이주를 꿈꾸던 우리 부부는 낯선 곳에서 사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에 닿았다. 대신 그때부터 지금까지 틈만 나면 여행을 다녔다. 그러다 마음에 쏙 드는 곳을 찾았다. 바로 제주였다.
휴가나 연휴 기간이면 제주도 왕복 비행기 티켓부터 사수했다. 누군가 ”어 디야? “ 라 물으면, ”나 제주도. “라는 대답을 자주 하게 되었다. 또주도라 부를 만큼 자주 다니며 내비게이션도 모르는 지름길을 알아내고 가게 주인분과 친분을 쌓을 만큼 자주 간 단골 가게도 하나 둘 생겼다.
만약 제주에 산다면 어디에 살고 싶어?
제주에 여행을 가면 우리는 마치 이사 계획이라도 있는 듯 동네 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제주에 있는 독특한 이사 문화인 ‘신구간‘ 이란 개념도 배웠다. 포털 부동산이난 어플보다는 제주오일장 신문과 당근마켓에서 부동산 거래가 활성화된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치 연습을 하듯 다른 곳, 다른 계절에 단행한 몇 차례의 제주 한 달 살기 끝에 드디어, 제주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제주살이 6개월 차인 나. 이젠 제법 이곳이 익숙하다. 애월, 금능, 봉성, 모슬포처럼 제주의 아름다운 지명을 알아가고 있다. 표선과 송당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동쪽에서 1박을 하는 걸 보고 친구가 “너 제주도민 다 되었구나.”라고 말했다. 제주에서 1시간 이상 운전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서울 강북에 살 때는 다리 건너 강남만 가도 운이 나쁘면 막히는 구간에 걸릴 수 있거나 주차 공간이 여의치 않을 수 있으니 늘 넉넉히 1시간은 잡고 다녔는데 말이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좋아하는 중국음식점이 생겼다. 볶음밥과 간짜장을 예술적으로 만들어서 가족들이 올 때마다 함께 갔다. 하루 2번 이상 산책을 해야 하는 반려견과 가는 산책자 목록도 잔뜩 늘어났다. 전날 밤, 집에서 보이는 먼바다에 고깃배 불빛이 선명히 보이면 내일 아침은 바다에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관광객이 몰리지 않는 수국길이나 절묘한 각도로 백록담이 선명히 잘 보이는 공원도 알게 되었다. 시행착오 끝에 마음이 잘 맞는 동물 병원도 찾았다. 히피펌 컬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주는 헤어숍 사장님도 알게 되었다. 자주 가는 하나로마트의 세일 소식은 네이버밴드로 가장 빠르게 공지가 된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이곳이 베푸는 친절을 하나씩 알아차리고 있다.
누군가 내가 사는 애월은 난개발이고 해안선이 예쁘지 않다고 하면 이젠 마음이 삐죽하고 솟아 ‘사람들이 진짜 애월의 모습을 모른다’며, 나도 모르게 애월을 두둔한다. 다른 마음으로는 집 근처에 오션뷰 카페보다 근사한 조망을 가진 공공 도서관의 열람실을 아무에게나 쉽게 안 알려 줄 것을 다짐하고 있다. 김나영이나 강민경 같은 유명 연예인이 유튜브 콘텐츠로 제주를 다녀가며 진짜 맛집을 소개하면, 당분간 못 가겠구나 싶다. 최근엔 초코크림처럼 고운 팥소가 든 찐빵을 못 먹고 있다.
주말마다 찾아오는 남편은 아직도 올 때마다 제주집이 어색하다고 한다. 그래 보인다. 카모마일 차를 찾기 위해 주방 선반의 이곳저곳을 열어보다 나를 부르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 늘 여행 온듯한 기분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같은 동네 출신답게 제주에서도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의 흔적을 찾는다. 나보다 남편이 잘 찾아내는 편인데, 아마 ‘나의 동네’로 인정해 가는 절차, 혹은 의식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난 남편에게 우리들의 서울집은 잘 있냐고 묻는다. 가끔 반려견 때문에 설치해 놓고 철거하지 않은 펫캠으로, 서울집 거실을 보곤 한다. 남편은 아직 제주집의 안부를 묻지는 않는다. 제주집의 안부를 물을 때쯤 남편도 제주를 자신의 동네로, 우리 집으로 인정한 것 아닐까 기대해본다.
김현철, 동네 (김현철 작사 | 김현철 작곡)
https://youtu.be/seh5j_HaAHc?si=n6gnhGc4aRxO3f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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