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과 싫증
MBTI 검사를 하면 컨디션에 따라 INFP와 ENFP를 오간다. 외향적이었다 내성적이라? I(Introversion)와 E(Extroversion)라는 반대 성향을 오가다니. 말도 안 된다, 검사가 틀렸구나 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술자리에 임할 때마다 나타나는 모순적인 나의 태도를 알게 된 후, 검사 결과가 내게 딱 맞게 나왔구나 싶었다.
여기서 잠깐. 술자리라니. 좁고 어두운 테이블에 따닥따닥 붙어 앉아 한 냄비에 담긴 국물 안주를 여럿이 떠먹고 화장실 다녀오면 바뀐 자리에 내 맥주잔이 어디 갔는지 알게 뭐야 했던 그 술자리? 마스크와 백신이 없던 시절의 일이라, 허구 내지는 허풍이 가득한 일 같이 느껴지기에 술자리에 대한 감각을 되살려볼 필요가 있지 싶다.
원래 우리에겐 회식 자리, 동창 모임, 생일 파티, 집들이 등 이름만 달리 붙였을 뿐 결국 모두 '술자리'라 불러도 무방한 모임이 참 많았다. 술자리를 처음 경험한 대학생 때나, 사회인이 되어서나 나는 꾸준히 술자리를 좋아했지만 싫어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술자리를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골치 아프게 싫어졌다. 술자리의 어느 지점부터 '싫증 난다.'라고 말하는 게 맞을 듯하다.
우선 술자리가 시작할 때. 너무 좋아, 아니 사랑한다. 술을 마시는 모임이라면 다들 평소 꽉 조여두었던 나사를 느슨하게 풀고 오는 법. 유머, 변덕, 웃음소리, 말의 속도 등 평소 측정해놨던 기본값이 조금 높아지거나 낮아져도 개의치 않게 되는 관대함도 넉넉해진다. 자리가 시작되고 얼마 후까지는 근황 토크가 이어진다.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사람과 부대끼며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 또래의 지인들에게 기특함과 대견함을 느낀다. 그 더럽고 힘든 꼴을 못 본 척했구나. 너도 어른이라고, 어른이 되느라 고생이 많네. 짠 한번 하자.
중간중간 술자리에 합류하는 뉴페이스의 등장도 루즈해질 수 있는 자리에 적당한 긴장감을 준다. A랑 안 좋게 헤어져서 안 올 줄 알았더니 왔네. 바쁘다더니 안 빠지고 참 의리 있는 녀석. 역시 저 사람 오자마자 누구누구 있나 줄 댈 사람부터 훑어보네. 메인 안주를 적당히 먹었다 싶을 무렵부터는 잔과 수저를 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생긴다. 자리 대 이동. 6인 이상의 술자리라면 끝과 끝에 앉은 사람은 대화를 하기 힘드니까. 난 주로 앉아서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편이거나, 부르면 이동하는 편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자리를 이동하는 사람들을 관조하는 즐거움도 알기에.
이상 여기까지가 E(Extroversion)의 성향이 발현되었던 술자리의 시간이다. 안주가 마무리되고, 숟가락과 젓가락이 머물던 곳에 바닥이 보인다. 봐야 할 사람과 말 섞어야 할 사람과의 마주함이 거의 이루어졌다. 담배를 피우거나 전화를 한다는 핑계로 술집 바깥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이건 술자리를 파해야 할 타이밍이 왔다는 거다. 이 타이밍을 눈치채고부터 I(Introversion)의 성향이 급격히 불타오른다. 그리고 이내 술자리가 징글징글해진다. 이젠 그저 집에 가고 싶다. 엄마 보고 싶다.
어쩜 이렇게 순간 딱 싫증이 나는지 나도 신기할 지경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술자리에서 나는 그래 왔다. 이건 함께 한 사람들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술자리의 시작은 명쾌하나 끝은 늘 모호했다. 왜 술자리의 엔딩 요정은 없는 것인가! 무사히 가게를 나와서 입구 앞에 삼삼오오 서서 못다 한 얘기(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고 쓸데 없이)로 귀가를 늦추는 그 찐덕찐덕한 머뭇거림이란.
코로나가 참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갖은 핑계를 대가며 만들어졌던 각종 회식 자리의 행방 불명은 코로나 초기엔 내심 좋아했다. 그렇지만 이젠 조금 그립기도 하다. 언제 집에 가야 할지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속으로 '싫증나 싫증나'를 되뇌었던 그때엔 얼굴 맞대고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지겹도록 싫증 냈던 술자리의 마지막보다, 벌써 떠나야 했던 타이밍인데 안 가고 버티는 중인 코로나가 더 싫증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