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lulu, HAWAII(U.S.A) 2017.02.27 10:53
이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온걸까. 이 시간에 여유롭게 비치 사이드 레스토랑에 앉아 브런치나 마실거리를 즐기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왜들 그렇게 자연스럽지. 매일 이렇게 사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제스쳐와 적당히 편하지만 다 내려놓진 않은 고급스러운 옷차림까지. 5성급 호텔에서 운영하는 곳답게 가격대도 높고, 심지어 하와이 호놀루루의 중심에 있는 곳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베시시 웃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날만큼은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었기에.
와이키키 해변을 바라보며 트로피칼 과일맛을 베이스로 한 마이타이를 주문했다. 실수로 이상한 걸 시킬까 메뉴판을 정독했으면서, 주문할때 만틈은 '알죠? 늘 먹던 걸로.'와 같은 여유진 톤을 흉내냈다. 그래봤자 테이블에 올려놓은 챙 넓은 모자와 현란한 프린트의 원피스 때문에 너무나 관광객이지만, 현지인이 아니면 그것 또한 어떠하리. 야자수, 해변, 그늘, 게다가 한낮의 알코올이라니. 적절한 풍경과 소품을 갖추고나니 그제서야 제대로 휴가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뭔가 치열하게 일에 몰두하다 간만에 휴가를 즐기고 있는, 멋진 어른의 모습에 취한 '나'까지.
하지만 그때의 난 멋진 어른과는 거리를 조금 많이 둔 상태였다. 연휴를 앞두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조기 퇴근을 했던 그 날. 나 역시 서둘러 퇴근 해야 했다. 두툼한 외투 속에 여름 옷을 숨겨 입고 미리 싸 둔 캐리어를 챙겨 공항으로 가야 했기에. 이미 출발했어야 할 시간에 난 텅 빈 회사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머리를 쓰기보다는 몸을 써야 하고,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능률은 매우 낮으며,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한번쯤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아무도 하고싶지 않아하는 일. 마치 침묵의 폭탄돌리기 처럼 눈빛과 손짓 만으로 서로에게 넘기고 넘겨지는 게임아닌 게임. 어느 회사에나 결국 언젠가 펑 터질 걸 알면서도 그 폭탄을 안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가장 약하거나 바보같은 사람이 그러한데, 우리 회사에서는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박스 1개에 20여권 정도의 책이 들어있었다. 박스를 옮기고 옮겨도 끝이 없었다. 어젯밤 신난다고 하와이 느낌으로 바르고 잤던 네일 컬러가 못난 모양으로 벗겨졌다. 양팔과 손목이 시큰했고,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이미 들어서 옮길 수 없는 무게의 박스였기에, 처음부터 허리를 구부리고 끌거나 발로 차서 옮겼다. 박스에 내 체중을 실어 밀어내는 꼴이었다. 그치만 막판에는 힘이 다 빠져 그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운 것 같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거 하나 뿐이었으니. 한껏 못생긴 얼굴로 눈물 콧물을 쏟았다. 얼굴만큼이나 구겨진 마음으로 떠났다. 명치까지 차올라 있던 번아웃이 터뜨려버린 폭탄, 아니 눈물을 막지 못한 채. 그렇기에 떠날 때부터 완벽하지 않으면 큰일날 여행이었다.
바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던 저 순간, 알아버렸다. 그때의 내게 완벽한 여행. 그 어려운 걸 하와이가 해냈다는 걸. 가슴에 꾹꾹 눌러담긴 겨울의 찬 기운은 이미 사랑과 정이 깊은 호놀루루의 햇살에 날아갔다. 적당히 탄 팔뚝과 목 언저리마저 초콜렛 색을 닮아 그런지 달큰한 온기가 머무는 듯 했다. 어디에서나 불어오는 소금기 담긴 바람, 우클렐레로 연주하는 심장 박동보다 느린 하와이안 음악, 선한 눈빛의 참으로 다정한 사람들. 시간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머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여행지가 어디냐 묻는다면 아마 당분간은 하와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올려다본 하늘의 구름이 흐르는 걸로 시간이 편히 가고 있다는 것에 만족한 나날이었으니.
그 곳에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일상에서 유지하던 속도를 살짝 낮추고 온 몸에 들어간 힘을 푼 정도였다. 그것 만으로도 어떤 여행은 완벽해질 수 있던 것이다. 나는 그걸 조금 늦게 알아챘지만 혹시 하와이를 찾을 분들이 계시다면 부디 다들 더 일찍 알아차리시면 좋겠다. 이왕이면 호놀루루 공항에 내리지마자 목에 꽃목걸이를 걸어주는 순간 알아차리시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