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도 좋고 남편도 좋고 다 좋은데, 집에 엄마만 있으면 완벽할 것 같아.
신혼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툴툴거리며 던지곤 했던 농담이지만, 실은 진심이 담뿍 담긴 말이기도 했다. 부끄럽게도 결혼 직전까지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님 집에 얹혀살던 캥거루 족이었다. 집을 나와 살림을 꾸리고 보니 그동안의 생활에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주 작은 구석마저 그랬는데, 이를테면 수박이 그렇다. 왜 갑자기 수박 얘기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름철 모자람 없이 먹던 수박마저도 엄마의 고단함이 잔뜩 묻어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엄마의 집에는 언제나 과일이 풍족했다. 한여름만 제외하고는 뒷베란다에는 늘 귤이나 한라봉 같은 하우스 과일이 박스 째 있었다. 김치 냉장고의 투명한 서랍 안에는 김치 대신 포도나 사과 같은 국민 과일이 계절에 맞게 들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를 열고, 더 아무 생각 없이 과일들을 꺼내 먹곤 했다. 다른 과일이야 비교적 쉽게 손질해서 먹을 수 있는데, 수박은 그렇지 않았다. 여름의 더위가 무르익을수록 엄마는 더 부지런히 수박을 쪼개고 자르고 또 잘랐다. 수박 껍질을 제거한 뒤, 빨간 알맹이만 한입 혹은 두 입에 나눠 베어 먹을 만큼의 사이즈로 깍둑썰기 한 것을 통에 담아 냉장고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두셨다.
봄에 결혼한 후 바로 여름이 왔다. 퇴근길에 들린 아파트 상가 마트에서 마침 수박을 저렴하게 세일 중이었다. 시원하고 아삭한 수박 맛을 떠올리며 한 통을 사서 남편 손에 들려 집에 왔다. 커다란 수박을 반으로 쪼개는 것부터 쩔쩔맸다. 껍질도 생각보다 많았다. 호쾌하게 잘릴 줄 알았던 수박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끈질겼다. 계속 칼질을 하다 보니 양손에 힘이 안 들어갈 정도였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시작한 수박 해체를 멈추기엔 이미 싱크대며 도마며 주방 곳곳은 어질러질 대로 어질러져 있었다.
엄마가 그랬듯 깍둑썰기한 수박을 반듯한 통에 담아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았다. 냉장고에서 차갑게 잠든 수박 더미를 보니 뿌듯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만 하루 만에 사라졌다. 나와 남편뿐인 신혼집에서조차 냉장고 속 수박은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남편이 수박 킬러였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기도 했다. 앉은자리에서 수박 반 통도 먹어치울 기세였다. 물론 나도 조용히 느긋하고 오랫동안 수박을 야금야금 먹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틀 정도 지나니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수박 그릇들은 모두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수박을 사서 잘라야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날 그 수박 한 통 썰기가 내 결혼 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비록 양에 비해 비싼 것 같고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왠지 맛도 집에서 잘라서 먹는 것보다 부족한 듯 하지만, 잘린 수박을 사서 먹게 되었다. 매년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나보다도 작은 몸집의 엄마가 커다란 수박을 두 동강 내며 쓱쓱 썰던 주방과 칼과 도마가 맞닿을 때마다 나던 호쾌한 리듬이 귓가에 맴돈다. 수박을 몇십통 먹을 동안 몰랐던 걸 고작 한 통 잘라보고 나서야 알다니. 미안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