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간지러운 시간

Phuket, THAILAND 2019. 06. 11 15:46

by 홍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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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시원한 눈코입에 기다란 팔다리, 마른 몸에 비해 우렁찬 목소리와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불쾌하지 않을 만큼의 솔직함과 유머, 누가 뭐래도 좋아하는 건 하고야 마는 화끈한 성미를 가진, 친구 M. 20년 지기 M과 난 중1 같은 반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의 나는 세상의 쓴 맛을 모르던 때라 친구도 학교도, 모든 게 즐겁기만 한, 그래서 사는 게 서툰 모범생이었다. 그에 비해 예쁘장한 얼굴에 장난기 그득한 눈을 가졌던 M은 늘 학교 안과 밖에서 즐거운 것들을 잔뜩 찾아내던, 그 나이의 아이들은 잘 모르는 '무언가'를 더 아는 아이였다. 이름 순으로 출석 번호를 매긴 덕분에 가까운 번호가 되었다. 자리도 가깝게 되었고, 번호순으로 4명~6명을 끊어 조를 짜는 몇몇 성의 없던 교사들 덕에 꽤 자주 같은 조가 되어 조별 활동을 하며 우리는 조금씩 친해졌다.


열댓 명이 되는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그렇지만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유독 M과 둘만 키득거렸던 기억이 많다. 남들과 조금 다른 것에, 그러나 나와는 같은 것에, 그래서 둘만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라는 게 M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확한 기억이다. 한 번은 소설을 라디오 연극 대본으로 각색해 녹음을 하는 조별 과제가 있었다. 녹음을 하러 조원들과 M의 집에 모였다.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해야 해서 대사를 버벅거리거나 잡음이 들어가면 다시 녹음을 해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별로 안 웃는데 유독 나만 어떤 포인트에 자꾸 터지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억지로 참느라 눈물까지 찔끔했다. 다행히 내 기억 에는 M도 함께 웃음이 터져 고생한 것으로 남아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조용히 낄낄거리고 웃었을 반면, 아마 M은 호탕하게 웃었을 거다.


우리는 다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었고, 공통의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사이가 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종종 손글씨를 꾹꾹 눌러쓴 편지를, 제법 주고받게 되었다. 요즘 어디에 살고 있고, 누굴 만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편지에 적어 보냈다. 칼 답장은 아니지만 잊을만하면 우편함에서 M을 마주했다. '친구야, 우리 우정 영원히.' '보고 싶다, 내 친구.' 같은 각별한 메시지는 없었다. 참 다행히도 둘 다 간지러운 건 취향이 아니었으니. 성인이 되고 나서는 만나서 술 한잔 하거나 맛집을 털고 노래방에 가서 놀다 헤어지곤 했다. 그래 봤자 1년에 한 번 제대로 못 볼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얼마 만에 만났고, 그동안 누가 더 연락이 뜸했는지 따위의 시시한 마음의 빚을 정산한 적은 없다. M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 중요한 건 여전히 우리가 같은 걸 보고 비슷한 박자에 웃음이 터진다는 사실이었으니까.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우리. 간만에 둘의 시간이 겹쳤다. 잠시나마 일상에 공백을 둘 수 있는 시기가 살짝 겹친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던 그 기회를 우리는 함께 여행 가기로 승화했다. 난 잠시 해외에 머무르던 시기라 내가 있는 곳과 한국의 중간지대쯤인 태국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번에도 쉽게 마음이 맞았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관광은 됐으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자고, 놀며 밀린 이야기나 실컷 하자며. 그 말이 나온 날 속전속결로 푸켓의 올 인클루시브 리조트를 예약했고 각자 항공권을 구매했다. 비행 일정 상 나는 아침 비행기로, M은 밤 비행기로 도착했다. 자정이 넘어 숙소에 도착한 M을 붙들고 꺄르르 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한참 얘기를 하다가 여러 일정을 위해 이젠 자야 한다며 누군가 단호히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도 우린 새벽까지 한참을 떠들다 잠들었다.


여유 있는 일정을 지향하는 여행이 컨셉이었지만, 우리는 둘 다 바지런하고 활동적인 스타일이다.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 일정을 보며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땡볕을 머리에 이고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그립법과 기초 서브만 간단히 배웠을 뿐인데 팬티는 당연하고 입었던 반바지가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찬물로 씻어내도 식지 않은 열기가 담긴 몸을 그대로 수영장에 던졌다. 썬베드에 누웠다 엎드렸다 자세를 바꿔가며 책을 읽고, 다시 좀 더워진다 싶으면 풀에 들어가서 풍덩거렸다. 틈틈이 비어있는 서로의 칵테일 잔을 우정의 이름으로 가득 채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햇빛에 익은 건지 쉼 없이 마신 칵테일 때문인지,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요가 원데이 클래스에 가서 맨 앞줄의 열혈 참가자가 되기도 했다.


해가 지는 저녁이면 소박한 관광지의 분위기에 마음이 조금 들뜨는 리조트 앞 작은 상점가로 나갔다. 점찍어 놓은 샵에 가서 마사지를 받거나, 손과 발에 헤나 타투를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망고나 리치 같은 열대 과일을 한 꾸러미 사 왔다. 숙소에 와서 와구와구 먹으며 쇼핑한 것들을 꺼내놓고 왜 샀는지, 언제 쓰면 딱이겠다는 둥 서로의 소비에 대한 응원을 담아 복기했다. 짧은 일정 와중에 먼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 스노클링도 했다. 알뜰하게 채운 일정 사이사이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의 이야기, 과거의 이야기, 미래의 이야기. 한 이야기의 시점이 복잡하게 얽혀있어도 전혀 헤매지 않는 건, 아마도 우리가 함께 쌓아온 시간이 제법 된 사이이기 때문. 그래서 함께 시간여행을 하는 거쯤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여행 중 우리가 나눈 많은 이야기 중 '이렇게 둘이 함께 여행을 오게 돼서 좋다'는 게 있었던가. 아마 없었을 거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 둘에겐 매우 간지러운 이야기에 속한다. 다만 리조트에 먼저 도착해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난, 리조트 내 기념품 샵에서 태국 관광지 사진으로 만든 촌스러운 엽서를 샀다. 평소에는 절대 사지 않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따 밤에 만날 M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자정이 넘어 도착한 M에게 당시 머물고 있던 나라의 기념품과 리조트에서 사서 쓴 엽서를 건넸다. M 역시 내게 한국 과자들과 비행기에서 입기 좋은 카디건, 그리고 편지를 건네주었다. 중학교 때와 비슷하지만 어딘지 좀 더 어른스럽게 변한, M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는 M의 글씨체. 그걸 보며 언젠가는 편지마저 부끄러운 나이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꾸준히 서로에게 다정해온 우리 관계의 질서는 다른 방식을 찾아 유연하게 지켜나갈 수 있을 거 같다는 확신을 했다.


중학교 때의 나에게서부터 한참 멀어진 지금의 나. 어떤 부분에서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 해도 될 정도로 변한 것도 있다. 버리고 싶은 면을 억지로 변하게 하려 오래 애쓰다 결국 실패하기도 했다. M 역시 그렇다.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중학생 M과 닮았지만, 분명 다른 지금의 M이 되어 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어떤 날은 어설펐던 14살의 나에게서 하나도 멀어지지 않은 것 같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며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는 자아와 마주하는 날도 있다. 이번 M과의 여행에서도 우린 여전히 함께 자주, 많이 웃었다. 정신없이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임에도 여러 차례 비슷한 지점에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덕에 가끔 헤매고 방황하는 나의 자아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그 모든 모습을 웃음으로 받아주는 M에게 '잘하고 있어. 넌 괜찮을 거야. 친구'라는 말을 들은 듯 혼자 간지러웠던 덕분에. 14살의 어설픈 나와 대단히 성장한 것 같지만 실은 뭐가 뭔지 모르겠는 30대 중반의 나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그러니 M에게도 나의 웃음을 통해 그 간지러움이 전해졌으면 한다.


M 덕에 이제 난 같은 걸 보고 비슷한 타이밍에 웃는 사람을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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