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소리
유독 고단했던 2025년의 노을이 지고 있을 때, 오랫동안 꾸며온 음모라도 되는 것처럼 SRT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측근에 연루된 사람이 전혀 없는 오랜 친구와 조우한 뒤,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동창들이 터를 잡은 대구를 '스치듯 안녕'하며 지나왔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시는 울진을 여정의 마지막으로 쉼표를 찍고서 ITX를 타고(동해역에서 KTX로 갈아탈 수 있다) 상봉역에 도착했다. 퍼즐 조각의 외곽을 따라 크게 노선을 잡은 이유는 많지만 중요한 얘기는 아니니 생략한다. 양 떼를 모는 보더콜리처럼 모든 걸 겸해서 한번에 몰아넣은 것뿐이다.
여행의 첫 경유지인 부산에서 오랜 친구를, 인연이 오랜 가뭄으로 기근에 이를 때쯤, 시기적절히 연락이 닿아서 혹은 내가 이기적으로 연락을 피하지 않아서 만날 수 있었다. 간헐적인 연락은 주고받았지만(친구의 일방향 연락이어서 주고받았다는 말은 옳지 못하다) 인사치레의 말만 앞서고 선뜻 만나지 못했던 친구인데, 불알친구나 학창 시절의 인연도 아니지만 적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이십 대에 만난 친구도 순식간에 먹은 나이만큼 오랜 친구가 되어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게 무려 14년 만이다. 우리가 국밥에 소맥 한 잔을 말면서 기억을 되짚어 본 바로는 그렇다.
14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막연해서였을까, 서로에 대한 연민이 남아서였을까, 긴 세월은 위아래로 찌그러진 맥주캔보다 훨씬 함축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그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건방지게도 삼십 대였다. 윤곽이 어스름한 두 사내가 낙엽처럼 푸석푸석한 마음을 안고, 빨간 구두를 신은 카렌처럼 SNS에나 어울릴 법한 곳들을 발이 닿는 대로 끌려다녔다.
해안 절벽으로 유명한 용궁사에서 바스러지는 파도를 보면서, 해안도로와 열차가 바다에 덧씌여서 교차하는 청사포를 서성이면서, 술은 관상용으로만 생각하는 친구와 선물 삼아 가져간 델라 파밀리아를 적시면서, 빈스 길리건의 새로운 시리즈에 감탄하면서, 난 '모스크바의 신사'를 친구는 '망량의 상자'를 서로에게 추천하면서, 텐동은 처음 먹어본다는 친구와 시선이 겹치면(게이 아님) 쓱하고 억지웃음을 지어보지만, 오랜만의 어색함은 좀처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20년이 훌쩍 넘은 발자취를 훑고, 풍파에 깎인 자국에 내려앉은 더께를 긁어내고, 말끔히 기억을 덧칠했다. 대구와 울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이 복원 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그 '질척하고 퍼석한 녀석'은 친구지만 사소한 오해들로 실제는 나보다 한 살이 많은데 이미 녀석이 통성명에서 놓쳐버린 아쉬움 같은 것이고, 내가 먼저 치고 들어간 개그 같은 것이다. 나이를 먹은 지금 딱히 빠른 생일을 강조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족보가 꼬이는 사연은 지금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하지만 그때 그런 이유로,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니었나 싶은 인연에 연루된 것이다.
대구에서는 특별할 것 없는 구성과 인원으로, 반가움의 인사는 오간데 없이 온갖 비난과 야유로 시작해 아쉬운 웃음으로 마무리되는, 당일 오후에 급조된 모임을 관통하듯이 지나왔다. 울진에서도 다를 바 없이 몇 안 되는, 별 볼일 없지만 지역 내에서는 인기가 좋은 식당에 들러 증빙하듯 부모님과 외식을 하고, 아직 남아있는 하지만 온기는 사라져 버린 내 방을 며칠간 맴돌다가 지나왔다. 무덤덤해 보이지만, 무덤덤해서 후회하고 되돌아보는 사람들의 진심 어린 충고 때문에 라도, 빠트릴 수 없는 것들이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하니 각별한 누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2주를 간격으로 친한 동생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2주를 사이에 두고 매형의 형님(매부)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여러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돈어른과 매형을 대신해 유족 대표로 장례 행렬에 동행하게 됐다.
장례 방식과 화장터를 결정하고 어디로 모실지 논의를 거쳐 청송으로, 다시 한번 대구로 향했다.
왜 하필 다시 대구일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에게 장례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첫 경험이라 당황스러웠고 절차가 매끄럽지 못해서 민망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건 예행연습 하지 않아도 된다던 각별한 누님의 각별했던 말로 위안 삼는다. 당황해도 괜찮지만, 괜찮지만은 않은 일의 연속이라 결국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돈어른께서는 지쳐서 울지 못할 정도로 많이 우셨다. 가끔은 운율이 정해진 서곡 같기도 했고, 이게 곡소리구나 싶은 전조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로 말미암아 어릴 때 조부모께서 돌아가셨을 때 들었던 고모들의 울음소리가 나를 뚫고 지나갔다. 업계가 힘들 때마다 '여기저기 곡소리 난다'던 표현은 앞으로 쓰기 힘드리라.
정신없는 3주가 지나고 보니 '주변엔 항상, 죽음이 맴돌고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메멘토 모리를 가르쳐 주신 그 멋진 교수님께서는 많지 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최근의 이야기들이 책장을 거꾸로 넘기듯 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역설적이게도 일주일간의 유랑은 주변을 다시 살피라는 계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라인홀드의 '평온함'과 '용기'와 '지혜'가 필요했다.
근래에는 애를 써서 한 달에 한 번꼴로 부모님을 찾아뵙고 있는데, 효심이라기보다 아직은, 부모님께서 메멘토 모리를 꿰뚫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해두는 형식적인 절차라고 해두자. 동년배 어르신들에 비해 우리 부모님은 무척 젊고 건강한 편이라는 것은 다행이지만, 운동을 안 하신다고 나무라는 게 민망해질 정도의 연세는 아니라서 여전히 감시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매부의 일이 있은 후부터 나의 생존도 확인시켜 주는 셈으로 친다.
그리고 5일 후, 부산에 계시는 고모가 돌아가셨다.
병원에 계신 지 27년 만이다.
부산에서도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