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파트(counterpart) 上
웍에 마구 흔들어 볶아댄 것 같은 머리를 견갑골 아래까지 산발로 늘어뜨리고 바닥솔 같은 수염이 하관을 빼곡히 덮고도 남을 정도로 수북한 걸 보니, 아무래도 1년 가까이, 사람에 따라서는 1년이 넘도록 관리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도 백정이나 다름없는데 행색은 또 어떠한가?
진한 곤색 스포츠웨어 지퍼를 턱 밑까지 채우고, 숯가루를 녹인 물에서 방금 꺼낸 것 같은 후줄근한 작업복 바지의 주머니에 푹하고 손을 찔러 넣고서는 졸린 눈으로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거푸 하품을 해대고 있다.
어울리지도 않게 예의를 차리는데 그마저도 비호감이다. 첫눈에 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주침과 동시에 이곳의 물질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반물질 같은 사람이 있다. 굳이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변을 본 것도 아닌데 소름 돋는 닭살을 쓸어내리며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가까이해서는 안 될 인물.
실제로 냄새가 나느냐의 사실을 다투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보는 것 만으로 냄새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가 몰려들기 전에 잠시나마 고독으로 치장할 수 있었던 이제는 환절기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짧은 구간.
2007년 10월의 오후에 미술팀 말단으로 현장에서 면접을 본 뒤 즉석에서 현장에 투입됐다. 능동적인 식당 종업원의 눈과 마주치기 위해 수동적으로 머뭇거리던 숫기 없는 인간은 누구에게나 '예스맨'으로 통했다. 선택은 나의 몫이 아니다. 면접 역시 볼 생각이 없었지만 전에 함께 일했던 팀장의 간곡한 부탁에 '예스'라고 답해버린 것이다. 그런 상관관계가 구축된 것을 깨닫고 자책한 것은 아주 오랜 후의 일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지금. 그러니까 이제 와서 후회하고 있다.
10월의 오후는 물가의 마른 바위 위에 엎드렸을 때 느껴지는 온기만큼이나 따사로웠다. 더불어 치열했던 현장은 여름 복장에도 땀이 맺힐 정도로 긴장이 넘쳤고 감히 남방 하나 걸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초저녁을 지나 가로등 불빛이 쨍해질수록 공기와 공기 속의 수분은 급격히 싸늘해졌고 보잘것없는 근육은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때 맞닥뜨린(encountered) 소품팀 소속의 '입만 살아있는 녀석'이 여분의 옷이 있다며 나에게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게 권했지만 그 또한 불쾌감이 들어 단호하게 거절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으로 비치는 게 싫었고, 예견된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물론 그것이 나의 의지를 벗어난 사정에 따른 것이지만 서투른 변명으로 들릴 것이 뻔했고, 이 정도면 아직 버틸 만하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위로했다. 그리고 단언컨대, 분명 그 옷은 깨끗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고음의 선명한 목소리로 소탈한 척 멋을 부리면서(그 당시에는 그렇게 느꼈다) 추우면 말해달라고 한다.
'그럴 일 없어'
일말의 자존심 같은 건 아니다.
그때 결국 그 '입만 살아있는 녀석'의 옷을 받아 들지 않았다면, 물론 그 옷이 더럽지 않았다고 하지만, 서로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역시나 별 다를 바 없는 진창의 길을 아직도 뒹굴고 있었을까?
우습게도 몇 년 후에 영화판을 떠났던 나를 다시 올가미로 낚아챈 인간이 바로 이 녀석이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과정이 아니더라도 나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나에게 맞지 않는 무언가를 걸치게 되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내가 그림을 계속 그렸다고 한들, 그리고 만약 우연치 않은 계기로 일찍이 글을 썼다고 한들 결국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나는 부지런했지만 나태했고, 부지런했기 때문에 나태했다.
영화판은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게 빛 좋은 개살구였다.
몹시 고단한 업무의 연속이었는데, 지금이야 업무 시간을 준수하는 편이고 스탭(staff)들의 저항도 녹록지 않지만, 당시에는 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아서 한 작품이 끝나고 나면 기껏 번 돈을 오롯이 병원비로 써야 할 판이었다.
급여가 충분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미술팀으로 첫 작품을 시작할 당시 6개월 동안 받은 돈이 고작 350만 원이다. 그마저도 힘깨나 쓰는 남자라서 50만 원을 더 얹은 것이고 그런 푼돈임에도 계약금과 잔금으로 두 번에 나누어 받았다. 대신 매일 일용할 양식과 내 몸 뉘일 곳은 주어졌으니, 대감댁 하인이 된 기분이 들지라도, 별 볼일 없는 인간에게는 생을 이어갈 토대 정도는 되었다. (애니메이션 동화맨으로 일할 때에는 기본급 없이 오로지 능력제였는데, 신입인 나는 첫 월급으로 15만 원을 받았었다. 그러니 형편없는 인간이 이 정도라도 받으면 꽤 괜찮은 보수라고 착각했었다.)
현장에서 스탭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는데, 어떨 때는 감정 쓰레기통으로도 가끔은 욕받이로도 쓰였다. 어떤 이는 샌드백으로 쓰이기도 했다.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날라서 발차기를 하던 쓰레기 같은 인간을.
군대를 한번 더 가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물론 진짜 다시 갈 생각은 없지만). 스탭들 사이에서는 "성철스님이 왔다가 쌍욕하고 돌아서는 곳"이라며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극단적인 육체노동은 물론이거니와 48시간 연속으로 촬영하던 때도 있었는데(누군가에게 들은 말로는 72시간 현장도 있었다.) 현장의 벽에 기대어 선 채로 잠들었다가 바닥에 꼬구라진 적도 있다.
한 번은 첫 작품 때의 미술감독이 세트장에서 일주일 넘도록 점심으로 자장면만 시킨 덕분에 똥 마저 검은색이었던 적도 있었다. 점심시간 한정 미술팀과 소품팀만 상주하는 세트장에서 메뉴의 선택권은 오로지 미술감독의 몫이었고 단지 시간을 아끼기 위한 방편이었다.
세트팀은 아득한 경력의 어르신들이 많았고 온전한 기술직이라 일하는 시간과 식사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어서 미술감독이 손을 댈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애송이였던 미술감독이 '일해라! 절해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미술감독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 팀원들의 몫일 수 밖에.
막내 팀원이었던 내가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그만두는 것 외에는, 보잘것없는 돈이라도 필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언젠가'라는 막연함으로 인고하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트장 세팅 끝나면 맛있는 거 사줄게 조금만 고생하자'라며 거창한 회식을 기대케 했던 그가 우리에게 치른 대가는 고작 자장면에 탕수육이었다. 지금도 이가 갈리는 그자의 값싼 위로에 자장면과 탕수육은 죄가 없었다. 삼겹살 한 점과 소주 한잔이 그리도 아까웠을까. 우린 화려한 것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그렇게 분해마지 않는 것들을 마치 전리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나 열심히 살았다며 영웅담을 풀고 있자니 그 또한 우습다.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삶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치욕들로 나의 나태함을 성실함으로 포장한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모순 덩어리라는 걸 부정하기엔 너무 나약했다. 그땐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회의감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차에 등 떠밀려 면접을 봤었던 두 번째 작품에서 2살 아래 '입만 살아있는 녀석'과 동갑내기 '"역시" 입만 살아있는 녀석'을 만나면서 미술팀 경력은 끝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입만 살아있는 녀석'은 '오지랖'이 많았고 '<역시> 입만 살아있는 녀석'은 '설레발'이 심했다. '오지랖'은 삶의 유일한 낙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의 일에 간섭했고 '설레발'은 그에 질세라 게릴라처럼 비난하고 참견해 댔다. 나 역시 깐죽거리며 그 대열에 합류했다. 세 명으로 몸집이 커져버린 무리는 현장에 도착하기만 하면 '야부리'를 털어대느라 정신이 없었고 본분을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오 신이시여,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그 둘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간절한 기도는 통했지만 '평온함'과 '지혜'는 깜빡 잊으셨는지 무모한 '용기'만을 내려주셨다.
권한 없는 용기는 객기다.
받아들이거나 분간할 수 없는 애송이의 용기는 달걀도 못 되는 메추리알이다.
동갑내기 팀장이 큰누나라도 된 것처럼 나를 유치원생 취급하는 데도 질려버렸다. 나 그렇게 어리지 않다며 대들었다. 자주 어울리던 '오지랖'과 '설레발'이 탐탁지 않아 하던 인물이라는 이유도 한몫하긴 했지만, 그들이 상황을 부추긴 것은 아니니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여자라서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듬직해 보이지 못한 팀원인 것에 화가 났을 뿐이다.
이십 대 초반과 중반을 넘어서도 혹은 삼십 대에도 남자들은 다 그렇다. 사십 대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알량한 자존심을 갑옷으로 단단히 옥죄고 있는 것이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하고 두 주가 더 지나고 있을 무렵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했다. 완만한 망원동 언덕길을 내려오다 헛디딘 발에 중심이 무너지면서 떼를 쓰는 아이가 발버둥 치는 것처럼 드러누워버렸다 ('오지랖'은 내가 고의로 발목을 꺾은 것 같다고 후에 증언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상태가 심각하진 않아서 반깁스만으로 충분했지만, 유리섬유로 늘씬하게 감싸는 통깁스와 달리 반깁스는 방금 마차에서 뜯어내어 덧댄 부목과 같아서 엄청난 부피를 자랑했다. 통깁스와 비교하면 엄지와 새끼발가락 정도의 차이라서 외관상으로는 부상의 정도가 훨씬 심각해 보였다 (일전에 통깁스도 해본 적이 있어서 잘 안다).
효과는 명확했다. 복귀한 나의 행색에 기겁한 미술감독은 특별한 형용 없이 권고사직과 귀가를 권유했다. 불가피한 구실이었지만 꼭 '그래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무모한 용기마저도 나의 간절한 소망을 막지 못했다.
-下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