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司馬懿)
마네켄 피스(오줌싸개 동상)의 물줄기처럼 쫄쫄거리며 비가 내리던 늦가을의 날씨에 즉석에서 회식을 하기로 결정하고, 퇴근 후에 오래전 찜해 두었던 전집에 대여섯 가량 모이게 됐다. 해는 여전히 구름 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겠지만 그 아래 프롤레타리아의 세상은 이미 서늘하고 어둑해진 이른 저녁의 분위기로 대조를 이루며 하늘과 땅차이만큼 시차를 벌려놓았다.
평소라면 쉬이 감상에 젖어 홀로 외로운 하루의 끝을 마감했겠지만 당장에는 술맛을 돋우는데 제격이었다. 자리를 잡은 후에는 비가 그친 지 오래라서 습한 기운은 이미 증발해 버렸고, 그에 못지않게 테이블의 적지 않은 영역 또한 바짝 마른 막걸리 병들이 점령한 상태였으니 모두 취기가 달큰하게 올라있었다.
막걸리 병들 중에는 분명 '사마의(司馬懿)'가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맨 정신에 의지를 가지고 마시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술이 우리를 들이키기 시작했고 몇 가닥 남지 않은 이성의 끈은 무의식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삼천포가 어디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던 시점에 직원 하나가 뜬금'포'를 탁자 위의 병들 사이로 올려놓는다.
"전 영국 스타일의 남자를 만날 겁니다!"
이만큼 좋은 안주가 없다. 시선이 일제히 삼천포를 찾아 그 친구에게 집중됐고 비스듬히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는 술의 힘에 기대어 비아냥거린다.
"오 그래? 영국 남자? 그냥 키 크고 늘씬한 백인 남자가 좋은 거 아냐?"
부족하다 싶어 한 마디 추가한다.
"그리고 잘생긴?"
"그런 건 아니에요!! 영국 스. 타. 일의 백인이라고 해두죠!"
"그 발언... '종(種)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거 아니냐? 유색인종도 공평하게 사랑하라고.
그리고 겉만 보고 영국 백인과 다른 백인을 구분할 수 있어?"
"음.. 선별하듯이 딱! 구분하는 건 아니지만 다들 그... 영국 느낌 아시잖아요.
생김새라던가.. 턱선, 눈매 같은 것들.. 수염이나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모든 재료가 마구잡이로 한데 뭉뚱그려진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다.
"아닌데, 난 모르겠는데? 영국 억양이나 발음이라면 또 모를까, '거봐 저 사람 영국 사람일 줄 알았어!'라는 식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잖아?"
영국 남자를 찬양하던 녀석의 입이 삐죽거린다.
달래듯 다시 질문을 한다.
"좋아!.. 그럼 질문을 바꿔서, 땅딸보에 곰보 같은 녀석이라도 영국 스타일 남자라면 괜찮은 건가?"
그 친구의 안면이 미세하게 떨렸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럼 그렇지.
"아.. 꼭 그렇지는 않은데... 하하!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겠죠!.."
확실하고 분명하게 애매한 입장을 고수한다.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다면 그게 꼭 영국남자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잘생긴 백인 남자를 좋아하는 거고"
"그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도 영국 남자들이 멋있다고 생각해요"
역시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은 대답을 되풀이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네"
병이 도졌다. 이 구역의 미친놈이 나라는 걸 상기시켜줘야만 했다.
"나는 말이야,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라고 하면 어김없이 잡채를 고를 거야.
물론 문어도 좋아하고, 물회나 홍게 그 외에도 수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잡채를 가장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 있어.
잡채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짝사랑, 아니 외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러곤 잔에 채워진 막걸리를 절반 가량을 비워낸다.
입술에 잔여물을 걷어내고 그날따라 제대로 감기는 술맛에 혀가 이쑤시개라도 되는 듯 쯥쯥 소리를 내며 입을 다셨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갈무리해 둔 대답을 쏟아낸다.
"나는 어느 변두리 기사 식당에서 찬으로 나오는 맛이 개떡 같은 잡채라도 진심을 다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말이야. 어떤 잡채인지는 상관없어. 잡채라고 하면, 맛을 따지지 않고 공평하게 머리를 박고 사료처럼 먹을 수 있지. 그 정도는 돼야 좋아한다고,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잡채에 따라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느냐의 문제는 별개지만, 그런 의미에서 너는 확실히 영국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잘. 생. 긴 영국 억양의 백인 남성을 좋아하는 거라고 봐야겠지? 애초에 너의 전제 조건이 잘못되기도 했고"
"......."
길이의 단위 중에는 '발'이라고 있다. 여전히 쓰이는 말이고, 그것은 아마 미국의 '피트(feet)'와 궤를 같이하는 단위라고 생각되는데, 피트는 대략 30.48cm의 길이에 수렴한다. 그날 술기운에 감으로 측정한 수치는 1.524미터(5피트)에 달했다. 그 친구의 입이 '댓 발(5피트)' 나와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말했던 '영국스타일'이 어떤 느낌인지 뻔히 안다. 하지만 그날따라 그 발언에 어깃장을 놓고 싶은 욕구가 마신 술의 양만큼이나 거꾸로 샘솟았다. 목표가 있지만 막연했고, 스스로 정의할 수 없는 것들로 제자리걸음인,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십 대의 평범한 인간이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정이 쌓였던 직원이라서 그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스스로 정확히 깨닫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컸을 뿐이다.
내 코가 석자라 남을 평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비겁하게도 그 친구에게 나를 투영하고 내게 쓴소리 하려던 것이다.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자문하면서, 치부 같은 나의 성향을 밝혀내고 어떤 더러운 것을 상상하고 있었는지, 어떤 것을 여태 숨겨왔고 밝히길 꺼렸는지 멱살을 잡고 고문하듯 나에게 따져 묻고자 함이다. 타자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오롯이 나를 위한 질문의 집합체이자 비밀일기 정도밖에 안 되는 이 글이 바로 나를 새삼스럽게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쓰다 구겨서 철망으로 짜인 휴지통에 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지나가던 사람이 곧게 펴서 본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지금과는 다르게 조금 이기적으로 살 것이다. 다음 걸음이 시작되면, 그러니까 나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날이 오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고이 모셔두었던 '우체부'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글에는 유려한 문장이나 세밀한 감정 표현은 없다. 반대로 멈추지 않는 나만의 보법이 있다고 판단했다. 형편없다고 말린 들 무슨 소용인가? 이미 노선은 착공에 들어갔고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에라이 망해라!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