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빨간 중년기 10

카운터파트(counterpart) 下

by 코 빨간 중년

정면에서 보면 타조알을 눕혀 놓은 형태의 빨간색 자명종 시곗바늘이 머리맡에서 7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직은 다 밝지 않은 시간에 시침과 분침, 각 숫자마다 찍힌 점박이들은 희붐하게 푸른 형광 빛을 내뿜고 있었다. 초침은 어스름에 가려진 채, 골동품 시계의 추가 오가며 나무통에서 울리는 소리보다 현저히 작은 공명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곳, 그 작품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오지랖'과 '설레발'은 밤샘 촬영을 마치고 빈자리를 채우려는지 20대가 자발적으로 일어나기엔 너무 이른 아침에 나를 깨운다. 아이폰이 나오기 훨씬 전이니 플립이나 폴더폰을 잠결에 턱 끝으로 겨우 열어서 받았을 것이다. 자동 사출되는 안테나로 귀를 판 적도 있었는데 딱히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깁스 때문에 절둑거리는 나를 집 앞까지 찾아와 태우고선 수유역으로 향한다. 거리가 지저분하고 북적대긴 했어도 수유역 부근은 밤낮 할 것 없이 놀기 좋은 곳이었다. 단적인 예로 그곳의 노래방은 작은 편의점처럼 스낵과 견과류, 건어물이 진열되어 있어 언제든 저렴한 가격에 원하는 안주를 고를 수가 있었고 캔맥주나 병소주의 가격도 편의점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유흥을 즐기기에 수월하고 접근성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각 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는 매장들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한 때는 시사프로에서 '고딩의 천국'이라 불리던 곳이었는데, "그 고등학생이 나이 먹은 게 저예요"라며 '오지랖'이 너스레를 떤다. 여전히 거리에는 교복과 정장이 뒤엉켜있었고 그 사이에 작업복 차림의 연변에서 넘어온 남자 세 놈이 스며있었다.


'아삼소(아침에 삼겹살과 소주)'로 시작해 노래방으로 마무리 짓고 나니 네온사인과 간판들은 이미 세차게 불을 밝혀 저녁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고, 방금 술자리가 끝난 우리는 이제 막 술자리를 시작하려는 사람들 사이를 휘청거리며 뚫고 지나갔다. 애초에 비틀거리니 나의 깁스는 위장용이나 다름없다.


1차로 자리를 잡은 게 아침 8시였으니 10시간 이상 마셔댄 것이다. 안주로 먹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취해서가 아니라 쉴 새 없이 먹어대서 속을 게워낼 지경에 이르렀다. 깁스를 한 상태로 말이다. 차라리 깁스를 하지 않고 일을 하는 게 더 건강할 '뻔'했던 게 아니냐 할 테지만 천만의 말씀, 그래도 술은 똑같이 마셨을 것이다. 그들을 보라, 밤샘 촬영 후에 낮술까지 마셔가며 거의 24시간 동안 깨어있지 않은가. 최소한 나는 숙면을 취했으니 그들보다 몸 상태가 나은 편이다.


맹목적인 의리 같은 것이었는지 그때는 또래의 사내끼리 어울려 망가지는 게 끝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각자 여자친구라도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진즉에 눈치챘고 의리의 끈적함이 반영구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도 그때의 야부리를 여지없이 되풀이하고 있지만, 새침데기들만 가득한 미술팀의 등살은 결국 소품팀으로 전향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이런 심리적 안도감을 구실로 엄마가 미워서 다른 엄마와 바뀌길 바랬다. 더 이상 이명은 없었다.





소품팀으로 경력과 지식은 바이칼 호수만큼이나 방대하지만, 깊이는 잘라낸 엄지손톱이 겨우 잠기는 정도에 불과해서 평범한 어떤 회사에서도 인정해주지 않는 무쓸모의 경력이었다. 다시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고 그만두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도 바보처럼 재차 발을 들여놓는 이유가 이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십수 년이 흘렀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직전에 개인사업자를 내고 소품을 들여놓을 창고와 사무실을 얻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도 큰 걱정은 들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모든 게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내 주제에 사업자를 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번창했다.

법인으로 전환을 하면서 제법 큰돈을 만지기도 했다.

이대로만 가면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뻔한 대사가 늘 머릿속을 지배했다.

'단지.. 그것은 사고였을 뿐이야'.


인생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는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상황은 조금씩 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모든 것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오만했던 것은 아니다. 코로나의 창궐로 OTT가 흥하면서 일거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나의 경우와 비슷한 회사들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영화 일은 줄었지만 여전히 OTT에게 의존할 틈이 보였으니 그래도 아직은 괜찮았다.


하지만 무형의 자원을 고갈시키며 찍어낸 작품들의 공급이 어느샌가 수요를 넘어섰고 국내 제작비가 연일 상한가로 치솟으면서 영화와 마찬가지로 OTT의 일감 역시 절벽을 만난 폭포처럼 바닥에 부서져 공기 중으로 흩날렸다. 정보에 의하면 국내 제작비의 절반인 일본으로 대부분의 일이 넘어갔다고 한다. 한국은 더 이상 OTT 개발도상국이 아니었다.


영화판은 코로나 시기 이후로 기대를 걸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늦어진다는 말이 돌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몇 번의 통화와 미팅이 있었지만 결과는 역시나 똑같다.

대기.

물론 여기에는 나의 '그' 성격이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은 탓도 있다.




'설레발'은 본인이 쓴 시나리오에 열정과 푼돈으로 제작한 단편 영화들을 이력으로 남기고 연출감독이 되고자 했지만 그 일은 여전히 잘되지 않는 것 같았고 그런 이유로 연락이 닿은 지 이미 너무 오래되었다. 그에 반해 '오지랖'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같은 회사 소속이었고 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서 여전히 손에 꼽히는 측근이다. '오지랖'은 부정할 테지만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일 년에 두어 번이나 술자리를 가지면 친한 게 맞다.


그 녀석이 19년 전, 햇수로 20년 전에 했던 꽤 인상적인 말이 하나 있다. '형 나는 빨리 친해지면 그만큼 빨리 소원해지는 것 같아서 말을 안 놔요, 그래도 형은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라며 강산이 대여섯 번 바뀌도록 나를 'XX 씨'라고 불렀는데 늘 느끼지만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그 녀석이 했던 유일하게 맞는 말이다.


그 말을 곱씹게 된 후에는 나 또한, 큰 보폭으로 성큼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이쯤이면 되겠다 싶을 때까지 말을 놓지 않게 됐다. 그럼에도 거들먹거리며 세상 잘 맞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소한 것들로 비위가 상하기 마련이다.


'내가 이 정도로 맞춰줬는데', '내가 너랑 나눈 정이 얼만데'라며 마치 '내가 널 어떻게 낳아서 키웠는데'라고 말하는 일일연속극의 어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섣부른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 나는 나를 더욱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창으로 휘휘 저으며 거리를 확보하는 수밖에.


'오지랖'이 술자리에서 대뜸 얘길 한다. 지금 형 주변에 남은 것과 남아있는 사람이 있냐고. 당황한 나는 그에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에둘러댄다. 실상은 달랐지만 당장에는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컸다. 이불을 집어차는 심정으로 며칠간 그 질문을 되새기고 곱씹었다. 간단한 질문이었고 크게 어려운 대답이 필요했던 것도 아닌데 순간적인 망설임으로 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인 것은 맞다. 조금은 슬프기도 했다. 아니 많이 슬펐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해서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한 적도, 잘못된 일을 한 적도 없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왔겠지만 그렇다고 후회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슬프고 아쉽지만 내가 옳다고 분류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큰 회한을 느꼈을 것이다. 그 가정된 상황보다 후회되는 것은 더 빨리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뿐이다.





1969년 5월 10일.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뀐 베트남 압비아 산의 937 고지는 '후에'와 '다낭'을 잇는 전술적 요충지였다.

미군 제101 공수 187 보병 3대대에게 사단의 지휘가 내려졌지만, 울창한 우림의 우산과 북베트남군의 단단한 땅굴 덕에 공중지원은 무의미했고 북베트남군의 강렬한 저항에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보병 전으로 고지 탈환을 노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폭격은 적군과 인접한 미군에게까지 적잖은 피해가 전해졌다. 그럼에도 공중지원 없이 북베트남군의 2개 연대 병력을 상대로 고지를 탈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른 대안은 있을 수 없었다. 전투와 폭격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압비아산의 울창했던 숲은 세찬 바람에 뒤집힌 소갈머리처럼 벗겨지고 말았다.


무모한 전투 속에 3대대의 손실은 심각해서 사단의 지원 없이는 추가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대대급이었던 작전은 결국 4개 대대와 2개 중대를 증원한 사실상 사단급 작전으로 규모가 불어났고 엄청난 화력과 인원에 힘입어 마침내 5월 20일 어렵게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점령한 고지는 전혀 쓸모가 없는 곳이었고 애초에 작전은 고지 점령이 아닌 북베트남군의 섬멸이 목적이었다. 목표물이 제거됐으니 부대원들이 철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937 고지는 어느새 다시 기어들어온 북베트남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햄버거 패티의 고기처럼, 부대원을 갈아서 치른 쓸모없는 전투라며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그에 빚대어 '햄버거 힐 전투'라 불리게 되었다.


937 고지의 정상에 꽂혀 있는 나무기둥에는 나무판 같은 것이 하나 달려있었는데 거기에는 철수하는 미군들이 써서 붙인 수십 장의 메모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Hamburger Hill, Was it worth it?"

(햄버거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나?)


나는 이제 영화판을 떠난다. 한두 계절 느긋하게 밭을 일궈 다지며 마음을 굳혔다. 나의 능력에 부족함을 느꼈고, 나의 옹졸함은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분께서 정치를 하던 당시,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악에 받친 데다 너무나 불행해 보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처럼 업적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 또한 이 일을 할 때만큼 불행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며 홀로 맞장구를 쳤다.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동안의 불행은 영화판의 구조 탓도 있겠지만 나의 탓도 많다. 유연하지 못한 성격으로 '모'와 '도' 사이를 오가며 배타적인 인간이 되어버렸다.


떠나며 스스로 묻는다.


'그렇게 생고생을 해가며 오랫동안 놓지 못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어?'





(쿠키)


엑스레이 검사 결과 골절 소견이 나왔다.

라이트 박스를 가리키던 담당의는 내게 고개를 돌리며 판에 박힌 결론을 내린다.


"아무래도 깁스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꼭 해야 하나요?(별것도 아닌데 푼돈이라도 벌어보겠다는 심산 아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안 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큰 문제는 없다고 하시면서 깁스를 권하시는 이유가.. 혹시(별것도 아닌데 푼돈이라도 벌어보겠다는 심산 아냐?)"


"깁스를 하지 않으시더라도 후에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리거나 아플 수가 있어요. 깁스를 유지하시면 제대로 된 치료를 하시는 거고 그런 사소한 불편은 거의 없을 겁니다."


"선생님이라면 제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야 물론 깁스를 하겠지만 어찌 되었건 선택은 환자분이 하시는 거죠. 원하시는 대로 해드릴게요"


겨우 2초? 3초 정도였을까? 두뇌는 풀가동 중이고 주마등이나 다름없는 만감이 교차한다.

나약한 사람아. 나는 푼돈이라도 벌고 싶긴 했지만 그보다 현장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 상태였다.


고민을 거듭하고 소심하게 운을 뗀다.


"해주세요"


"네?"




"해주세요... 깁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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