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삶시 세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도 Apr 26. 2022

경포대에서

"어떻게, 훌훌 잘 털고 왔습니까?"


택시에 타자마자 기사님께서 건네신 첫마디였다. 경포대를 한참 거닐다 열차 시간에 맞추어 강릉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요 몇 주간 속이 차근차근 뭉치는 느낌이 나더니 뭔가 단단히 맺혀버렸는지 체기가 잦아지고 있었다.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며 오밤중에 강릉까지 온 것이었다.



"네, 갑갑했었는데 바다 보니 좋네요."


"그냥 바라만 봐도 시원- 하지 않습니까, 한때 내 낙이었다 이말입니다. 속이 턱턱 막히면 밤바다에 가는거지예. 씨청한 파도소리 들으면서 담배 한 모금 쭈욱 빨아들였다 뱉으면, 크흐, 고민도 뭣도 그냥 싹 내려가 마 저 파도가 다 가져가는 것이지요. 그나저나 이제 서울 가실라꼬?"


"네."


"서울 사람들 맨청 택시 타면 물어봐요. 기사님, 어디로 가면 돼요? 여그 바가지 안쓰는 식당 어디가 있냐고. 그럴 때면 마음이 참 아파요. 나는 강릉 토박이인데, 여기 사람들은 참 장사질 못해요. 쩌기, 쩌어기 저런 식당들 보면 이제 광어 한마리에 십오만원씩 받고 그런다 아입니꺼. 보면 다 타지에서 온 장사치들이에요. 이제 여름이 오면 이 횟골목에 쭈욱 서서 자기네 가게 오라고 명함을 돌리는데, 그럴 땐 택시 안에서 창문을 열고 명함을 받아카야합니다. 토박이 기사들 얼굴 보면 걔네들도 그짓말을 못하니까. 아, 기사들끼리는 경포대는 안갑니다. 회 먹고 싶을 땐 쩌 골짝으로 가요. 회 제대로 먹을라믄 두당 오만원은 잡아야하는거 알고 있소? 그럼 쐬주까지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요잉."



한동안 듣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도는 문장들이 이어졌다. 마치 오디오로 먹방을 체험하는 것 같아서 속으로 조용히 감탄사를 내지르며 귀를 열고 있었다.



"원래 직업은 택시 기사가 아니였어요. 무려 서른 다섯년동안 해양수산부 산하 조직에서 일을 했지요이."


"아, 은퇴하셨군요. 고생 많으셨어요."


"사실 내가 퇴직하고서 마음에 볭이 생겼어요. 우울증이라카드마. 퇴직하고 다음날 눈을 딱 떴는데, 하루 웬종일 마음이 허했어요. 이제 해야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 몇 달간 집구석에 짱박혀 있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마누라가 병원에 같이 가자고 하데. 커다란 병원이길래 자기가 가는 줄 알았더만 웬열, 진료실로 나를 쑥 집어넣어. 의사가 참 잘 오셨다고 했어요. 이것 저것 검사를 시키더니만 다행히 초기라고 하더라고요. 퇴직하고 나서 맥이 쑥 빠졌다지요. 그러면서 약에 대한 설명을 쭉 해줬어요. 정신과 약은 간질 약과 비슷하대. 간질 알지요? 그 그, 갑자기 거품 물고 부글부글 하는거. 간질약이 뇌에 반응을 줄여줘서 발작하는걸 막는다고. 그 양반이 정신과 약은 한번 먹으면 평생 먹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도저히 자기는 처방을 못해주겠대. 그러더니 나보고 자기랑 약속 하나만 하제요. 딱 일년만 아주 바쁘게 살아봅시다! 어떤 일을 해도 좋으니 딱 일년만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보라고. 그럼 맥도 뭣도 쑥 잡힌다고 해서 지장을 탁 찍고 나왔지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게 이 택시 일이에요. 사실 이 일도 그렇게 길게 하진 않아요잉. 이제 여섯시면 집 들어가야지. 그래도 확실히 좋아요. 사는 맛이 납니다."


"명의를 만나셨네요."


"그랗지요?"



나의 저 맞장구는 진심이었다. 문득 아주 오랫동안 한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지 생각했다. 삶에 큰 의미와 자부심이 되었던 이름이 한순간 썰물처럼 쓸려나가는 일은 얼마나 깊은 상실감을 줄까? 뭐든 야트막하게 접근하는 법이 익숙했던 내가 닿기엔 너무나도 까마득한 감정이었다. 잠시 상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속이 쌔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아 고개를 탈탈 털어 현실로 돌아왔다. 의도했던 의도치 아니했던, 무언가가 나의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하는 일은 참 용기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차는 역에 거의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사님은 택시들이 주욱 서있는 승강장에 꼬리를 붙이듯 차를 대었다. 내려서 저짝으로 올라가면 돼요. 그리고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뒷자석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두 눈이 힘 있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 천지 다 자기 잇속 챙기는 사람들밖에 읎어. 사람 너무 믿지 말아요. 강릉도 자주 내려오지 말아요. 가끔 내려와요."



나는 푸핫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요, 자신을 믿어야지요. 나의 대답을 듣곤 끄덕끄덕 하는 기사님을 보고 가볍게 목례를 하며 문을 닫았다. 역으로 걸어가며 속으로 말했다. 저를 믿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지혜롭게 믿고 싶어요. 그런 눈과 힘이 나에겐 생길 것이다. 기사님의 마지막 조언을 되새기며 속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체기가 돌아 꽉 막혀있었던 속이 가스 활명수를 마신 듯 갸름해졌다. 열차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아직 밥을 먹을 엄두는 나지 않아 따뜻한 두유와 단 도넛을 사서 꼭꼭 씹어 먹고 서울역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었다. 살살 풀어져가는 속에 새 기운이 돌고 있었다.





글을 쓰며 떠오른 시 한 편을 공유합니다.


<지우개>

송순태 


잘못 써내려온 문장이 있듯이
잘못 살아온 세월도 있다
바닷가에 앉아서 수평을 보고 있으면
땅에서 잘못 살아온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오는 이유를 알겠다
굳은 것이라고 다 불변의 것이 아니고 출렁인다고 해서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구나


굳은 땅에서 패이고 갈라진 것들이 

슬픔으로 허물어진 상처들이 바다에 이르면

철썩철썩 제 몸을 때리며 부서지는 파도에 실려

매듭이란 매듭은 다 풀어지고

멀리 수평선 끝에서 평안해지고 마는구나 


(중략)


매거진의 이전글 내 친구 조 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