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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도 Oct 19. 2019

사는게 지칠 땐 뚱바 링거를

어른이 생활 속 단지 우유의 의미

한없이 축 처지는 날이었다.


카페인이 부족한가 싶어 차가운 아아를 들이켜봤지만 영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면 당인가? 싶어 서랍 속 초콜릿도 먹어보고, 온갖 젤리들에 과자까지 씹어봤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이런 날이면 나는 바나나 우유를 찾곤 한다.

다른 우유 말고, 푸근한 항아리 단지에 담긴 바로 그 '뚱바'를.


짜잔



팩우유들과는 사뭇 다른 둥글둥글한 외형이 근사하다. 하나 집어 팽팽한 은박지에 뾰족한 빨대를 쿡 꽂아 넣고(한 번에 들어가면 은근 쾌감이 느껴짐) 한 입 쯉- 빨아들여본다. 온몸에 수액이 돌듯 포근한 달달함이 샤악 퍼져가는 게 느껴진다. 이거슨 결이 다른 당이로구나아, 온몸에 뚱바 피가 돌았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길 여러 번. 언젠가부터 나는 이걸 뚱바 링거라고 불렀다.






아주 어렸을 적, 할머니와 단칸방서 살던 때 이야기다.


우린 매주 일요일마다 동네 목욕탕에 갔다. 주일이면 꼭 새로이 몸단장을 해야 한다는 할머니의 신조 아래 새벽같이 집을 나서곤 했는데, 잠이 깨기도 전에 뜨거운 열탕에 들어가 몸을 불리고 있으면 곧 할머니가 나를 불러 때를 밀어주시곤 하셨다. 물론 그녀의 손맛은 이 땅의 많은 어머님들이 그러하시듯 아주아주 맷콤하기 그지없었다.


어린 날의 나에게 이건 일요일마다 주어지는 일종의 고행과 같았다. 온몸의 피부들이 붕 뜬 것처럼 얼얼한데도 할머니는 도통 나를 놔주시질 않으니... 눈물 찔끔 흘리며 그 당시 셀 수 있었던 숫자들을 전부 세고 또 세고 있으면 바가지에 담긴 미지근한 물을 두어 번 뿌리시곤 등을 탁탁 두들겨주시는 것이다.



"다 끝났다. 어여 가서 놀아"



그럼 나는 좋아하는 냉탕으로 달려가 언제 울었냐는 듯 첨벙거리며 할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할머니는 고생했다며 바나나 우유를 사주셨다. 목욕탕 매점에서 처음 만난 이 둥그런 우유는 향긋하고, 달달하고, 마시면 기분이 막 좋아졌다. 우유를 마시며 한껏 신이 나 있으면 할머니는 한 토실했던 나를 보며 단지 우유가 단지 우유를 먹는다고 놀리시곤 했다. 통통한 몸이 싫었던 그때의 나는 들을 때마다 토라졌는데 이젠 다 귀엽고 그리운 추억이 되었지.


아마 이때부터인 것 같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닻을 내린 이 단지 우유는 내가 언제고 마실 때마다 '너는 이렇게 사랑받았었던 아이'라며 그때의 기억들을 되새겨주곤 한다.


아마 내겐 뚱빠섬이...


아마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었나 싶다. 빡빡한 사회생활 속 어른 행세하기 지치는 그런 날. 그래서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그저 할머니 손 잡고 목욕탕 가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 그런 날. 이렇게 마음 한 구석 뻥 뚫린 날엔 서랍 속 다디단 까까들도, 퇴근 후 예능과 함께하는 치맥도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저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달려가 서둘러 뚱바 링거 하나를 입에 물 뿐이다.






누군가에겐 이 링거가 딸기맛 츄파츕스일지도 모르겠다. 아님 냉장고 속 자그마한 야쿠르트거나, 놀이공원 속 따끈따끈한 츄러스일수도 있겠지. 그게 어떤 모습이건 간에 그들은 어느새 어른 살이를 하게 된 우리가 사회 속에서 나 자신을 잊어갈 때 즈음 슬쩍 찾아와 말해주곤 한다.



너는 이렇게 사랑받고 자랐던 아이야.



어디가 무너졌는지도 몰랐던 맘 한 구석을 메꿔주는 건 덤. 언제 또 빵꾸 뚫릴진 모르지만, 덕분에 오늘은 괜찮아졌어. 땡큐 뚱바 링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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