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기 루이보스차 Hornimans Frambuesa Rooibos
본가에서 가져온 티박스를 뒤적거리다 산딸기 티를 찾아냈다. 꿀 국화차로 유명한 오르니만스에서 나온 친구인데, 따뜻한 물에 우려내면 달콤한 산딸기 향과 루이보스 향이 방 안에 차분히 퍼져나간다. 차분하게 기분이 들뜨고 싶을 때 이 티를 자주 꺼내게 된다.
몇 년 전, 스페인에 다녀온 친구가 한국에 돌아온 당일날 연락을 했다. 선물을 문 앞에 두었으니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메시지를 받고 나가보니 대문 앞엔 엽서와 함께 갈색 종이봉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그 속엔 모자 쓴 거북이 모양의 비누와 밀카 초콜릿 한 덩이, 그리고 이 오르니만스 티 팩이 들어 있었다. 내 생각을 했다니! 당시 우리는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들이었다. 자신을 위해 쓰기도 바빴을 시간이었을 텐데 그 틈 사이사이에 나를 떠올려준 그 친구를 생각하니 그 마음이 한없이 귀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먼 나라 아무개씨의 상점에 있었을 그녀를 상상한다. 무언가를 고민할 때 나오는 그녀 특유의 표정과, 가볍게 미간을 찡그리고 흠- 하며 이것저것 고르다가 하나를 택했을 그 친구가 눈 앞에 그려졌다. 아니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 하는 입모양을 지으며 날 닮은 저 거북이 비누를 덥석 잡아선 자박자박 걸어가 예의 바르게 계산했을 것이다.
- 기쁘게 받아주었으면 좋겠구먼!
다시 한번 친구가 쓴 엽서를 읽다가 저 문장에 턱 걸려버렸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익숙한 친구 목소리가 들려와 마음에 나비가 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티가 역력한 글자들과 나에 대한 애정이 담뿍 전해지는 문장들에 기분이 요상해져서, 코맹맹이 소리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다 욕을 바가지로 먹곤 서로 낄낄댔던 시간을 떠올린다. 우리는 어렸고 자주 불안했지만 동시에 작은 것에 행복했고 많은 것을 꿈꿨다. 이십대 초반의 시간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사는데 감각이 둔해지는 시기가 있다. 매일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들이 반복되고 그 무엇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되는 순간엔 늘 삶에 별다른 애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가 한번 누군가 나를 아낀다는 마음이 크게 느껴지는 날엔 저 수면 밑에 눌러놓은 삶의 감각들이 서서히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그것은 더 이상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걸 수도 있고, 그들이 내게 알려준 것처럼 나도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관계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자유로이 존재하면서도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말 그대로 인간人間이다. 사람 인(人) 자의 한자 모양새가 두 사람이 서로 맞대어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에 사이 간(間) 자를 붙여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뜻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뜻이라고. 단어가 뿌리를 담고 있다고 느끼며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한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방향성은 개인의 가치관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늘 명료히 깨어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닿는 모든 감각들을 소중히 대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최대한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나는 다시금 부지런해지고 좋은 감각을 주는 다양한 것들을 곁에 두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다시금 스스로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동력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며 나는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삶이 버거울 땐 저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럴 때면 내게 소중한 마음을 준 사람들을 기억하려 한다. 그들에게 받은 따뜻한 마음들을 떠올리다보면 결국 사랑만이 지친 사람을 밝은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닌가 생각케 된다.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아마 이것이 아닌지.
그러니 오늘도 좋은 하루를 만들어보자고 다짐했다. 마치 농사와 비슷해보였다. 지금이 한여름처럼 느껴질지라도 곧 날씨가 쌀쌀 해질 테니까. 조금 욕심을 보태자면, 난 따끈따끈한 군고구마도 먹어야 하고 새콤달콤한 귤도 포기할 수 없고 과메기도 광어도 시원한 겨울 무도 숭덩숭덩 잘라 이것저것 해 먹어야 한다. 그러니 미래에 있을 언젠가의 나를 위해 오늘도 바지런히 살아야겠다. 소중한 그들을 챙기고 챙김 받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