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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도 Apr 28. 2021

오프 데이

쉬는 날이었다. 그 날은 아무 계획이 없었다. 지난 몇 달간 늘 누군가를 만난다던가 어딘가를 다녀온다던가 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아무 일정이 없는 날이라니! 갑자기 24시간 사이즈의 커다란 도화지를 받아 든 아이처럼 나는 하루를 어떻게 채워야 하나 아득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오거나 마음을 자극시킬만한 것들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무얼 할까 고민하다 습관처럼 SNS를 켰는데 오늘따라 핸드폰 속 세상마저 너무나도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문득 강박적으로 뭔가를 채워 넣으려 하는 마음에 조금 지쳤다고 느꼈다. 음, 오늘은 최대한 자극 없는 하루를 보내야겠군. 나는 휴대폰을 끄고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평일 낮의 집은 조용했다. 잘만 하면 공기가 떠다니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냉장고의 소음을 제외하곤 내가 움직일 때 나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 사실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져 일부러 더 뒤척거리며 소음을 만들었다. 이렇게나 느리고 조용한 세상이라니. 산다는 것은 늘 너무 빠르고 혼란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천천히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뚝 서있는 건물이 봄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거실 바닥엔 창문을 통해 빛이 찾아와 내려앉아있었다. 맑은 날 오전은 참 따뜻하게 노랑노랑, 하늘하늘, 초록초록. 창문과 바닥이라는 커다란 액자에 여러가지 색들이 서로 일렁이며 섞였다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나는 바람 한 점 않는 시간 위에 작은 나룻배를 타고 떠 있었다. 적어도 지금 만큼은 스스로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이 배를 흔들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마주하자 낯선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만 같았다. 온 시간의 키를 내가 움켜쥔 감각. 언젠가부터 그렇게나 다시 찾아 헤매던 감각이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넣어야만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걸 여기서 찾는다고?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보물상자를 발견한 사람의 심정이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내 시간을 내가 끄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나를 이끌어주길 바라던 나를 마주한다. 부끄러워졌다. 도리어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 마음은 다시 갓난쟁이로 되돌아갔는지도 모른다. 보호와 이끎을 갈망하며 도대체 무엇이 나를 채워줄 수 있냐고, 누군가가 내 키를 대신 쥐고 있는 것 마냥 어리광을 부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그 사실을 가장 잘 받아들인 것처럼 살았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성숙한 척 가면을 쓰고 열심히 그런 사람인 것 처럼 흉내를 내고 살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 어느새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고 고대하던 자유는 이미 찾아와 있었으나 내가 그걸 쓰는 법에 서툴렀다는 것을, 그래서 몰랐음을, 자신의 세상은 자신이 만들어나간다는 뻔한 명제가 나에게도 이미 적용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시선을 주변에서 나로 돌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인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치 당연한 사실을 굳이굳이 떠올린 사람처럼 조금 머쓱해졌다.






다시 현재로 돌아왔을  집은 여전한 평화와 함께 나를 반겼다. 아무튼 내가 없을 때의 집이 이런 느낌이라는 거지. 정오를 향해 달리던 빛은 조금씩   해지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벽지의 질감을 조금 씹어보다가 그동안 목적 없이 밖으로 나다녔던 시간들이 아쉬워졌다. 온갖 자극에 물들여진 마음엔 도리어 조용한 적막이  어떤 것보다도 크게 느껴지는구나. 앞으로 쉬는 날엔 혼자 집에 있는 것도 괜찮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멍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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