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위를 둘러보면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소하고 자잘한 것들에 에너지를 쓰던 나와는 달리 그들의 삶은 항상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합리와 효율이라는 두 기준에 근거하여 원하는 것을 쟁취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당시 나에겐 그 어떤 것보다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 그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벗어나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은 감정을 쳐내는 일이었다. 감정은 변덕스러워서, 똑같은 입력값을 보내도 당시 나의 기분, 환경, 앞뒤 맥락에 따라 항상 결괏값이 달랐으니까. 효율적인 삶을 위해선 변수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더는 이렇게 불완전한 것이 내 삶의 키를 잡게 놔두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감정을 죽였다. 습관처럼 감정이 올라오려 하면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효율적인가?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거침없이 억눌렀다. 효율과 합리의 독재였다. 가끔 참을 수 없이 감정이 올라오는 날엔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 들어가 속으로 되뇌었다.
감정은 날 미숙하게 만드니 도움이 안돼.
감정은 느끼지 않을수록 좋아.
시간이 흐르면 아무것도 아닐 것들에 흐트러져서는 안 돼.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나는 내가 옳다는 느낌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는 확신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인처럼 편협한 논리로 포장된 아집만을 쫒았다. 충분히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에도 늘 승패가 따라다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오늘 함께 시간을 보냈던 상대방의 미묘한 표정이 잔상처럼 떠다니는 날엔 이를 마음 한 구석에 억지로 묻곤 뒤척이며 잠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납작한 사람이 되었다.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졌고 필요한 말이 아니면 나누지 않았다. 이런 나를 보고 누군가는 드디어 네가 사회인이 되었다며 껄껄 웃었고, 또 누군가는 로봇이 따로 없다며 과거의 내 모습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스스로도 뭔가 기울어져간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아직 가야 할 길이 머니까, 신경 쓸 것이 많으니까 하는 핑계로 불편한 마음을 눌러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먼 곳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햇볕 가득 내리쬐는 창밖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들었다. 알 수 없는 큰 힘이 허리케인처럼 휘몰아쳐서 나는 마음을 컨트롤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이를 받아내야만 했다. 그동안 눌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온 것인지 갑작스레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게 뭐지?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두 번째 지진이 닥쳤다. 이번엔 마음이 저릿저릿하고 금이 가듯 아파왔다. 세 번째, 네 번째는 기다림도 없이 찾아왔다. 그 날 감정들은 재해의 모습으로 불시에 몇 번이고 찾아와 마음을 쑥대밭으로 만들곤 사라졌고, 나는 폭풍을 연달아 겪은 마을처럼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나를 보았다. 현재에 느껴지는 것들을 제 때 받아들이지 못하면 언젠간 반드시 후폭풍이 닥친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마침내 감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해서 이성과 감정 둘 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둘의 밸런스를 잘 맞추는 것이 현명한 것이겠구나. 폭풍이 휩쓸고 간 마음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삶의 방향성을 수정해야겠다 다짐했다.
과거의 나는 말한다. 감정이 네 삶을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니. 신경 쓸 일들이 너무 많아질테니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틀렸다며 다시 채찍질하려 할 때마다 나는 상기한다. 삶은 단거리 마라톤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성과 감정에는 우열을 나눌 수 없다는 것도.
무얼 믿고 그리 사냐 물으시거든 앞으로는 시간을 믿는다고 대답하겠다. 그는 날카로운 것들을 깎아내는데 선수이기도 하니까. 이 날뛰는 감정을 어련히 다듬어주지 않겠냐며, 그러니 걱정 마시라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노을 지는 풍경을 마음에 담아놓을 수 있는 이유,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마다 여러 가지 감정이 일어나는 것, 나를 지키기 위해 일어나는 화나 여러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할 땐 한바탕 울어버릴 수 있는 것도 전부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고. 그 밸런스는 점차 찾아갈 테니 부디 지켜봐 달라고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