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에 대하여_

'Romance', OCTOBER

by 레드오렌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카뮈의 질문에 나는 대답한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 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彼岸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이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일할 수도 더 놀 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도 타인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조금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면 된다.


by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무한한 우주 속 먼지 같은 인류의 보잘것없는 삶 같이 와닿지 않는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해 말이다. 이제야 겨우 수명의 반의 반 정도를 살고 있는 사람이 삶에 대해 논하다니! 괘씸해도 이렇게나 괘씸할 수 없다. 연세 지긋이 드신 어르신들께서 덕담 삼아, 혹은 술안주 삼아 나누시는 삶에 대한 성찰이 비로소 들을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내가 사는 삶, 떳떳하게 정의하고 살아가야 죽음에 이르러 비로소 삶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다. 내가 정의한 삶을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죽음에 떳떳할 수 있겠는가.


당연하게도 나는 삶에 대해 모른다. 아니,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삶에 대해 모른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래서 '삶'이 무엇인지 명확히 깨달은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삶을 살고 있다. 숨을 쉬고 있으며, 꿈을 꾸고 있다.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생명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질문을 달리해야 한다. 우리는 왜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누구에게 물어도 상관없으나 자기 자신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그 어떤 사람의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언어로서 내 삶의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내일 죽음이 찾아올 수 도 있다. 출근길에 갑자기 나타난 도로 위 고양이에 깜짝 놀라 자동차 핸들을 급하게 왼쪽으로 틀어 마침 거기에 있던 가로수를 운전석에 들이박고 머리가 깨져 죽을 수 도 있다. 혹은 우연히 오늘 먹은 우유가 알고 보니 상해있던지라 식중독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수도 있다.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당신, 이러한 죽음이 실재할 수 없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 죽음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로마시대의 격언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이유다.


삶과 죽음은 떼놓을 수 없다. 이는 동전의 앞면이 없다면 뒷면도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곧 내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와 같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물었다.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충격적인 질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묻다니, 굉장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곧 삶의 핵심이다. 내가 살 이유가 없다면, 즉 내 스스로가 이 삶에 딱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건 자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곧, 카뮈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다.




"난 지금까지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X 같은 코미디더라고." 영화 'JOKER'에서 주인공 조커가 현실을 깨닫고 내뱉은 말이다. 자신의 인생이 비록 슬프지만 엄중하고 비장한 비극인 줄 알았으나, 사실 알고 보니 그런 수준 높은 작품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행인 한 명이 훑고 지나가는 코미디였을 뿐이라는 그의 말.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영화나 드라마로 여기며, 이 길의 끝에는 해피엔딩이 기다린다고 믿으며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어쩌면 조커의 말처럼 우리는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하는 삶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조커를 우리는 영화 속 주인공으로 시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커는 자기 자신의 삶을 X 같은 코미디라고 여겼지만 사실 그는 영화 속 주인공이다.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지를 결정하는 건 결국 나다.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그러니 우리의 삶을 1인칭으로,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내 삶을 1인칭으로 돌아보면 다소 건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중간중간 촉촉한 구석이 없는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건조한... 나는 이런 내 삶을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루하다며 기피하는 게 다큐멘터리이지만, 그것을 제작하는 과정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명품 다큐를 만들기 위해서 제작진은 온갖 곳을 방문한다. 북극, 아마존, 우주, 심해를 막론하고 좋은 영상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간다. 뿐이랴, 영화나 드라마처럼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을 받는 시청자도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같은 내 삶에 나는 만족한다. 영화처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드라마처럼 기승전결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날 것 그대로의 세상을 표현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삶을 말이다.


그런 내게도 부끄러운 과거는 있다. 생각하기 싫고 남에게 드러내기 싫은 그런 과거 말이다. 흔히들 '이불 킥', '흑역사'라고 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이러한 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흑역사를 두고 감추려고 한다. 흑역사를 건드는 사람들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흑역사도 나 자신의 역사다. 그러므로 흑역사를 외면하기만 하는 그 상태로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카뮈의 질문에 대해 거꾸로 된 답변을 내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역사 중 일부를 죽여가면서, 부분 부분을 자살하면서 구멍 낸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의 '흑역사'를 마냥 숨길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대면하고 납득하며 있는 그대로의 내 역사라고 인정해야 한다.




"삶을 돌아보았을 때 내가 거친 곳이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발전했기를 바란다." 어느 날 한 선배가 본인 삶의 목표라며 남긴 말이다. 어느 자리까지 올라가야겠다, 어느 직책을 맡고 싶다는 구체적 목표 하나쯤은 있을 텐데 그는 그저 추상적으로 '웃으며 떠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나는 그의 목표가 가지는 추상성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목표는 구체적이어야 된다는 사람들의 말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목표는 분명 구체적일수록 목표를 향한 방향성이 확고해진다. 길을 잃어도 찾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주는 게 구체성이다. 그런데 이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100억 원대 자산가가 될 거야'라는 삶의 목표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의 미래는 둘 중 하나다. 100억 원을 가진 자산가가 되거나, 그러지 못하거나. 100억을 가진다면 삶의 목표를 이룬 것이 된다. 100억이 통장에 찍히기까지 평생을 달려온 그의 삶이 완성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는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왜? 삶의 목표가 100억을 가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100억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가 살아온 모든 삶이 부정된다. 결국 그가 지금까지 열심히 땀 흘려 벌어온 돈은 의미 없는 것들에 불과해진다. 왜냐하면 그가 만들고 일궈온 것들은 결국 100억을 가지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비약이라면 비약이다. 그러나 그만큼 삶의 목표는 내게 있어 궁극적이다. 다른 목표도 아니고 '삶'의 목표다. 내가 자살하지 않을 이유다. 그래서 궁극적인 목표일수록 추상적일 필요가 있다. 삶을 돌아봤을 때, 자기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걸맞게 살아왔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그런 목표, 삶의 순간순간에 대입하여 나 스스로가 나 스스로의 삶을 작위적으로 해석해서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목표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행복하게 살겠다, 나는 매사 즐겁게 살겠다' 같은 목표가 그 예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럽더라도 미래에 지금을 돌아보았을 때 행복해 보였다면, 목표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작위적인 해석이 가능한 그런 목표.


그렇다면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부끄럽게도 여전히 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어렴풋이 추상적인 답변은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궁금한 것이 많다. 세상 많은 것들의 결말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의 끝을 보고 싶다. 기다리던 소설의 후속 편이 완결을 보고싶다. 지금 공부하는 이 과정의 끝에서 전문가가 된 나를 보고싶다. 대한민국의 분단이 끝나는 것을 보고싶으며 언젠가 우주로 진출할 인류의 모습을 보고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내 이루어져 행복하게 살고있는 내 모습을 보고싶다. 좋아하는 가수가 은퇴하는 날까지 그가 내는 음악을 듣고싶다. 이것이 죽는 그날 비로소 만족하며 내 삶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그런 소박하고도 추상적인 목표다. 카뮈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자살하지 않는 이유다.




Ralph Waldo Emerson이 정의한 올바른 삶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거짓된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찾아내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

그대가 살았다는 이유로

한 사람이라도 더 쉽게 호흡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글쓰기에 대하여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