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에 대하여_

‘Nocturne in Paris', Tony Anderson

by 레드오렌지

어떤 것이 옳은지에 대한 고민은 항상 우리를 괴롭게 한다. 특히 반드시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 선택지 일지 고르는 경우가 그렇다. 만약 둘 다 옳다면, 무엇이 더 최선의 선택일까? 혹은, 옳은 것과 나쁜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에서 옳은 것을 선택해서 내가 피해를 입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들. 끝내 선택한 결정 그 뒤로 다가오는 죄책감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추구하는 정의에 잡아먹혀 끝내 괴물이 되어버릴지. 딜레마, 정의에 대한 딜레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정의가 있고, 모두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정의에 대한 가장 유명한 책을 꼽으라면 ‘정의란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겠다. 한동안 대한민국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았던 그 책은 그저 질문을 던진다. 다양한 정치철학과 작가가 생각하는 정의를 조심스레 내비치고 있으나 어떤 것이 정의로운 선택인지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손에 맡기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고민하고 때로는 같은 책을 읽었던 동료들과 토론을 한다. 서로의 답이 옳고 서로의 정의가 옳다는 답변을 확인할 때도 있겠으나 네가 틀렸고 내가 맞았니 하며 싸움을 벌일 때도 있다.


트롤리의 딜레마는 이 책에서 언급한 정의에 대한 질문 중 가장 유명한 것일 게다. 달리는 기차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있고 한쪽 길에는 5명의 사람이, 다른 한쪽 길에는 1명의 사람이 있다. 어느 쪽으로 가던 그 길에 있는 사람은 분명 죽는다. 어디로 가는 게 옳은가? 거의 대부분은 1명의 사람이 있는 쪽을 선택한다. 아무리 그래도 5명의 목숨보다는 1명의 목숨이 비교적 가볍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그 상태에서 작가는 다른 상황을 제시한다. “그 1명이 너의 가족이라면?”


갈림길

독자들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아니, 그 한 명이 내 가족이면 말이 달라지지. 근데 나는 이미 한 명이 있는 길로 방향을 트는 게 옳다고 말했잖아?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같은 인지부조화를 겪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내 가족을 내가 죽이는 건 좀 그렇지. 살려준 5명이 나 덕분에 살았다는 걸 모를 수도 있잖아?’라며 대답을 바꾸기도 한다. 그 한 명이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5명을 살리겠다는 사람도 있으며 기차를 탈선시키면 안 되냐,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겠느냐 질문을 하며 논점을 이탈하는 사람도 있다.


다양한 답변이 나온다. 사실 답변이라기보다는 집단 독백에 가깝다. 어느 대답이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이 서로 목소리 높여 주장을 던지다 보면 어느새 처음 나왔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묻히게 된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라고 타협하고자 하는 비겁한 겁쟁이도 있다. 내 가족의 생사가 놓여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당장 기차가 어느 길을 골라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토론장은 서로가 다르고 각자의 주장이 난립하는 아수라장이 된다. 다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 하나가 있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 것인데?”




"그러니까, 죄명이 살인이군. 편의를 위해서 실제 죽였다 치지. 이제 레드락에서 재판을 받을 텐데, 만약 유죄를 선고받으면 주민들은 당신을 교수형에 처할 거고 교수형 집행인인 내가 직접 집행을 맡는 것이지. 이런 체계적인 일들이 실제 벌어지는 걸 ‘문명사회의 정의’라고 하지.

만약 피해자의 친지들이 이곳에 찾아와 저 문을 부수고 당신을 눈밭으로 끌고 가 목을 매단다면 그건 ‘개척지 정의’라고 하지. 개척지 정의의 장점은 무척 통쾌하다는 거야. 단점은, 옳은 만큼이나 틀릴 확률도 높다는 거지. 물론 네 경우는 달라. 넌 당해도 싸지. 그런데 누군가는 아닐 수도 있어.

궁극적으로 그 둘의 차이가 뭘까? 그 둘의 차이는 바로 나야, 교수형 집행인. 난 당신이 뭘 했든 죽일 때 쾌감을 느끼지 않지. 나에겐 그저 일일 뿐이야. 레드락에서 당신을 처형하고 다음 마을로 가서 또 다른 사람을 처형하지. 레버를 당겨 당신 목을 부러뜨리는 자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지. 그리고 그런 냉정함이 정의의 본질이야. 냉정함 없는 정의 구현은 틀릴 수 있는 위험이 있거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 풀 8’에 나오는 교수형 집행인의 대사는 다소 의외의 답변을 내놓는다. 기존에 널리 퍼져있던 정의와는 뭔가 다르다. 보통 ‘정의를 집행한다, 정의를 구한다’라는 문장에는 거대한 악을 앞에 두고 두 손에 칼을 쥔 채 맞서 싸우는 전사, 뜨겁게 타오르는 공명심을 가슴에 품고 앞으로 달려 나서는 용사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흉악한 범죄인을 감옥에 가두기 위해 그의 범죄행위를 낱낱이 고하는 검사, 혹은 악에 의해 고통받는 선량한 피해자를 변호하는 변호사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데 이 교수형 집행인은 정반대로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냉정함을 정의의 본질이라 말하고 있다. 반박하려 해도 묘한 설득력에 빠져든다. 마지막 대사가 다시 생각에 잠기게 한다. ‘냉정함이 없는 정의 구현은 틀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는 대부분 국가 법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녀는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서있다. 특이한 것은, 두 눈에 천을 둘러 감아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에 서있는 사람의 겉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겉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의 인종을 알 수 없다. 그의 외모가 반듯한지 흉한지 알 수 없다. 그가 악독하게 생겼는지 순하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그가 편이 많은 사람인지 고독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가 늙은 사람인지 젊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저 귀에 들려오는 사실과 왼손에 들려있는 저울만이 앞에 선 자의 죄를 판단한다. 이것이 냉정함이다. 동정심도, 적개심도 가지지 않고. 사실 그대로만을 판단하는 것. 그렇게 결정하여 칼로 내려 방벌 하는 것이 ‘냉정함’이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어린 시절 이방원과 홍인방의 대화는 주목할만하다. 이방원의 스승이었던 홍인방은 한때 권문세족의 횡포를 앞장서 비판하며 포기하지 않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설파했지만,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자기 자신이 권문세족의 앞잡이가 되는 변절자가 되고 만다. 변절자가 된 홍인방과 한없이 타락하는 고려에 큰 회의를 품은 이방원은 한밤 중 만나 대화를 나누며 갈등을 빚는다.


홍인방은 자신에게 어째서 악한 자들과 일을 꾸미느냐는 이방원에게 되묻는다.

“악은 무엇이고, 선은 또 무엇이냐? “


이방원은 대답한다.

“소생은, 적어도 선하기보다 정의롭고자 합니다. 선은 악마저도 포용하고 받아 안는 것이지요. 하나 정의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합니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써 정의롭습니다. “


이방원의 대답에는 공명심 넘치고 호기로운 기상이 느껴지고 정의의 본질을 일갈하는 듯하여 속이 편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석연찮다. 찜찜하다.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뒤섞는다.


정의가 방벌 해야 하는 ‘악’은 누가 정하는가? 어떤 게 악인가? 악을 방벌 한다는 목적으로 나름의 정의를 추구하는 나는 또 다른 악의 화신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판단하고 있고 방벌 하고자 하는 저 악이 정말 악인가? 저렇게 호기로운 분노를 가지고 정말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냉정함이 필요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어렵다. 결코 답을 내릴 수 없다. 다만 그의 말에 의심할 여지없이 동의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선과 정의는 다르다는 것. 모든 것을 품에 안는 보자기와 칼로 내려치는 정의는 다르다는 것.


많은 고민, 많은 생각들에 잠겨 끝내 명확한 답변을 내릴 수 없다. 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만개의 정의가 존재한다. 그만큼 정의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르다.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순결하고 궁극적이며 신성불가침 한 ‘정의’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정의에 다가설 수 있을지는 어렴풋이 떠오른다. 영원히 이어지는 끝없는 길에도 내가 발 딛고 서있는 땅과 길이 향하는 방향은 존재하지 않던가.




정의 집행의 결과는 비가역적이다. 그것은 벌금을 물리는 것이던, 목숨을 빼앗는 것이던 상관없이 비가역적이다. 이미 빼앗긴 재물과 목숨으로 얼룩진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기에 고민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고뇌해야 한다. 아무리 확신에 찬 결정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네 생각이 틀릴 수 있듯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 언제나 정의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법원의 판사만 정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삶에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정의를 판단한다. 사람을 벌주는 것만이 정의 집행의 방법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도덕률에 근거해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인지 판단하는 하나하나가 정의 집행이다. 쓰레기를 바닥에 버리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부터, 동료에게 성희롱을 일삼는 자를 신고하는 것.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것. 그렇게 눈을 뜨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정의 집행이다. 냉정함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정의 집행이다.


정의를 판단하는 우리는 판단하는 순간만큼은 최대한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살아오며 가지게 된 주관성을 완전히 버리기란 어렵다. 따라서 자신의 주관성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하며 때로는 자기 자신조차 의심한 뒤에 내리는 최종적이고 냉철한 결론.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끝내 내려진 냉정한 결론. 그리고 그 결론을 내리기까지 인생을 살아오며 겪어왔던 수많은 고민들, 질문들. 그것이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자신만의 정의로 향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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