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에 대하여_

'Fireworks Festival', RADWIMPS

by 레드오렌지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때 즈음하여 하나 둘 파르스름한 머리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할 준비를 한다. 드물게 찾아오는 시베리아의 차가운 바람이 시샘을 부리며 서리를 맺어 괴롭힐 때도 있지만 점점 올라오는 봄기운을 막아설 수는 없다. 따뜻하게,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 기운에 파릇한 머리들은 하나 둘 망울을 맺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세상이 감췄던 사람들이 하나 둘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영혼 없이 나무를 바라보던 그들은 어느새 나타난 망울에 뭇내 웃는다. 웃음이 들려올 때마다 망울은 껍질을 벗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 껍질, 두 껍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하얀색 조각조각이 망울을 딛고 일어서고 이내 흐드러져 웃음들을 향한다. 이 나무, 저 나무 온 거리의 온 나무에 하얀색 조각들이 펼쳐져 흐드러지고 점점 더 커지는 웃음들이 만들어낸 봄 향기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온다. 언덕 위에 올라 웃음이 만개한 거리를 바라보니 이제야 보이더이다, 분홍색이였다는 것을.




벚꽃은 항상 그 해가 최고였다고 느껴지도록 매해 최선을 다하여 꽃망울을 터뜨린다. 어떻게 그렇게 부지런한지 한 번을 빠지지 않고 풍성한 분홍빛 하늘을 만들어 낸다. 벚나무도 나무인지라 몇백 년을 살아가는 개체도 있을진대 그 또한 세월에 눌려 게으름 피우지 않고 매년 부지런히 피운다. 가장 처음 벚꽃을 본 순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중학생 때부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벚꽃을 꼽았던 것 같다. 집 바로 앞에 있는 개천을 따라 마련된 도보로 좌우로 벚나무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어 봄만 되면 그 길이 벚꽃으로 만개했다. 도로명 주소도 OO벚꽃로일 정도로 유명한 그 길, 지금도 여전히 봄에 벚꽃을 피우는 그 길을 꽤 자주 걸었는데, 공교롭게도 재수를 하던 시절에 학원을 가기 위해 꼭 지나야 하는 길이기도 했다. 한 밤중 터덜터덜 공부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형형색색 조명에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붐비는 그 길을 그때의 나는 피하고 싶었다.


벚꽃

조그마한 요소요소가 모여 커다란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벚꽃이다. 기름에 물감을 개어 한 자국 한 자국을 신중히 찍어내 전체를 완성하는 유화가 가진 매력과 같다. 꽃잎 한 장의 전체를 채운 하얀색 배경에 분홍색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을 뿐인데, 그 물방울이 모여 거대한 분홍빛 세상을 만들어내니 말이다. ‘조화’라는 단어가 생명체가 되어 살아난다면 벚꽃이 가장 적합하리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꽃술이 사방으로 펼쳐져있는 꽃잎 가운데 서있는 모습을 보면 꽃망울 속에 산다는 엄지공주가 생각나기도 하고, 어린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동화책의 주인공이 꽃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뿐이랴, 앙증맞게 피어난 꽃받침을 지탱해주는 솜털 난 꽃줄기를 보면 그를 꺾어 귀에 꽂고 함박웃음을 하고 이곳저곳 뛰노는 시골 아이들이 그려진다.


촤아아- 하며 바람에 날리는 벚꽃잎을 보면 비로소 봄이 오나 싶다. 한반도의 사계절이 봄여어어어름갈겨어어어울로 변해버렸다지만 그럼에도 봄이라는 순간이 오는 건 필연이며 그 필연을 소리로 알리는 게 벚꽃이 날리는 소리다. 꽃받침을 우뚝 딛고 일어났던 하얀색 꽃잎 한 장이 가야 할 때를 알고 휘날리는 바람에 몸을 맡겨 날리는 그 소리. 그 소리가 울리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벚꽃잎의 종착지를 만나게 된다. 대부분의 잎은 바닥에 그대로 내려앉아 분홍빛 카펫을 만들어낸다. 어떤 잎은 커피 향 흘러나오는 카페 간판에 내려앉고, 어떤 잎은 지나가던 행인의 머리칼 사이에 숨어들어 그의 집까지 가는 길을 동행한다. 지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벚꽃, 그 벚꽃이 지는 소리. 그래서 그 소리가 봄이 오는 소리다.




전국적으로 벚꽃이 유명하다는 곳을 꼽으라면 항상 나오는 곳이 경남 창원시 진해구다. 벚꽃이 피어오르는 4월이 되면 진해에는 ‘군항제’라는 이름의 벚꽃축제가 열리고, 전국 곳곳에서 놀러 온 관광객들로 붐빈다. 부산에서는 진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기다란 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진해에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이야 매년 돌아오는 작은 이벤트겠지만 처음 진해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동네를 보고 놀란다. 정말 도시 하나가 통째로 분홍색이 되기 때문이다. 휴대폰 카메라에 별다른 필터를 씌우지 않고 찍은 사진임에도 이미 분위기는 분홍빛 봄으로 인화될 정도다. 벚꽃이 특히 흐드러진 경화역, 로망스 다리, 장복산 근처에는 평소보다 유난히 사람들이 붐비기에 이곳이 서울인지, 진해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진해 군항제, 여좌천 로망스 다리


온 진해가 벚꽃잎으로 물들어 사람들로 북적일 때 우리는 항상 학교에 있었다. 군항제는 항상 중간고사를 낀 기간에 열려 주말에 밖에 나가 축제를 즐기는 건 꽤나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고사는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고 잠시 외출을 나가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나갔던가? 남아있었던가? 축제가 진해 시내에서만 이루어졌던 건 아니다. 학교 안에서도 나름의 축제가 벌어졌다. 학교 안쪽에도 벚꽃나무가 많았기에 벚꽃이 만개한 교정을 거닐며 서로 모여 사진을 찍어 추억을 남기는 게 주요 콘텐츠였다. 벚꽃사진 콘테스트 같은 학교에서 마련한 조촐한 대회에 사진을 출품하고 전 생도가 저녁시간에 모여 웃고 떠들기도 했다. 특히 우리 학교는 바닷가와 벚꽃이 어우러진 이국적 향기가 짙게 머무르는 포토스팟이 많았는데, 그런 곳에서 본인만의 인생 샷을 건지는 생도들도 많았다. 친한 동기들끼리, 선후배끼리, 혹은 교수님과 제자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 여전히 사진첩에 많이 남아있다.


학교에서의 벚꽃축제 하이라이트는 야간 비상소집훈련이었다. 저녁식사 후 불시에 울리는 비상소집 방송에 소총을 손에 들고 대략 5km 정도를 뛰고 돌아오는 훈련이다. 이게 무슨 축제의 하이라이트냐 되묻는 사람, 혹은 동료들도 있겠으나 나는 분명 그게 벚꽃 축제의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동료들과 도로를 달리며 바라본 저 멀리 정문 너머 남원로터리의 하늘에는 불꽃이 굉음을 내며 터져 올랐다. 도로 옆에는 가로등 불빛에 그림자에 드리운 벚꽃 나무가 주욱 서있었고 바닷바람에 갈 곳을 잃어버린 벚꽃잎들이 마련한 줄무늬 커튼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길바닥에는 아무도 감히 밟지 못한 분홍빛 카펫이 짙게 깔려있었고 밟을 때마다 퍼져 올라오는 벚꽃의 아지랑이에 바지 밑단은 모조리 젖어버렸다. 땀을 흘리는 그 와중에 아름다움을 느꼈다. 비록 저 밖에서 즐거이 추억을 쌓는 이들과 함께 하지는 못했더라도 이 도로 위에서 벌어진 한밤중의 뜀박질은 내 심장을 뛰게 하기 충분했다. 그게 낭만이었다.




매년 돌아오는 봄의 벚꽃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레 올 것을 확신하기에 기다릴 이유도 없다. 그저 문득 생각날 때, 다음 벚꽃 축제 때는 어디를 가봐야지, 누구랑 가봐야지 하는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할 뿐. 시시콜콜하다가도 설레고 설레다가도 금방 일상으로 돌아오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설레고. 기다리지는 않더라도 속 깊이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제나 그랬듯 매년 최고의 꽃망울을 틔워내는 벚꽃을, 찬란히 흐드러진 그 분홍빛 물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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