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flow', MC Sniper
우뚝 솟은 나무들 사이로 한줄기 빛이 내려와 나무 기둥 뒤로 회색 그림자가 맺힌다. 나뭇잎은 햇빛을 따라 펼쳐지고 뿌리를 타고 올라온 덩굴이 검푸른 색깔을 발한다. 따뜻함을 품은 나무가 흘린 땀방울은 곧 옹이구멍 사이로 흐르고 한 마리 나비가 내려앉아 목을 축인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더듬이는 이내 한쪽 방향으로 곤두서고, 퍼드득. 나비는 놀란 듯 날아가 버린다. 다람쥐다. 이곳 저곳을 두리번 거리다 마음을 먹은 듯 나뭇가지를 타고 다른 나무로 뛰어간다. 파드닥, 다람쥐의 발소리에 놀란 나뭇잎 몇 장이 떨어져 내린다. 바닥에 닿을락 말락, 땅을 흐르는 조용한 바람길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나뭇잎은 오래지 않아 나뭇기둥에 조그맣게 피어난 버섯에 내려앉는다.
계절을 표현하는데 나무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봄, 하늘하늘 천천히 따스함을 머금고 날아오는 봄바람을 맞아 찬란한 분홍빛 벚꽃잎을 터뜨리는 벚나무. 여름, 한가득 습기를 머금고 널찍한 그늘을 드리우며 매미소리 울려 퍼지는 플라타너스. 가을, 차츰 차가워지는 날씨 속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듯 빨갛게,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 겨울,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와 몸을 감싸는 차가운 눈바람을 천천히 인내하는 자작나무. 계절마다 나무가 가진 특색이 달라 그것을 감상하는 맛도 즐길만하다.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생태계가 존재한다. 나무 밑동에서는 버섯이 자란다. 나무 겉면을 감싸는 껍질 사이에는 개미나 풍뎅이 같은 것들이 기어 다니며 군데군데 파여있는 옹이구멍에는 새가 둥지를 틀고 나뭇잎 아래 진딧물이 맺혀있다. 거대한 지구에 서식하는 가장 거대한 생물체인 나무는 그 자체로 소생물들의 지구가 되어준다. 덕지덕지 달라붙어있는 하늘소와 진딧물에 수액을 다 빼앗겨 고사하는 나무도 있다.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나무는 죽은 이후에도 그것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자신의 육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나무가 죽으면 온갖 종류의 청소부들이 달라붙어 나무를 분해한다. 끝내 분해가 끝나고 남은 토양에 새로운 나무가 뿌리를 내린다. 다시 새로운 지구를,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낸다.
각각의 계절, 그 안에 각각의 생태계를 품은 나무가 공존하며 숲을 만들어간다. 어떻게든 더 많은 햇살을 받겠다고 하늘 위로 뻗어나가다 서로 얽히고설켜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다. 거대한 지구, 그보다 더 거대한 우주가 숲에는 펼쳐져있다.
나무는 식물들의 수렴 진화 결과라고 한다. 식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적 진화를 마쳤을 때 궁극적으로 가지게 되는 형태가 바로 나무 형태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참나무는 소나무보다 민들레에 가깝다. 대나무는 풀의 한 종류로 분류되지만 우리는 나무라고 부른다. 각각의 식물 종이 생존을 위해 투쟁한 결과가 나무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놀라울 수도 있지만 사실 당연한 이치다. 나무뿐만 아니라 바다에 사는 게도 그렇다. 게가 아님에도 진화를 거듭하여 게처럼 변하는 절지동물이 있다. 결국 그 형태, 식물의 경우 나무 형태와 절지동물의 경우 게 형태가 해당 생물이 살고 있는 환경에서 생존에 가장 최적화된 모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의 진화도 그러할까? 지금 우리가 가진 육체의 형태가 정말 생존에 적합한 상태일까? ‘인간화’라고 말할 정도로 인간은 영장류 포유류의 궁극적 형태일까? 생물학자가 아니기에 정확한 답을 내릴 수도 없거니와 그럴 자격조차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관찰 주제를 던질 수는 있을것 같다. 바로 궁극적인 진화의 형태를 가진 나무들도 모두 각각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가을을 대표하는 단풍나무는 프로펠러 모양의 씨앗을 뿌리고 손바닥 모양의 이파리를 틔운다. 은행나무는 부채 모양의 노란색 잎으로 만개하고 동그랗고 심지어 독까지 지닌 열매를 바닥에 떨군다. 모두 같은 나무의 형태를 가졌는데도 말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듯, 그토록 다양한 형태가 모두 생존에 적합한 방식이다. 어느 한 가지 타입만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 모든 생물체가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생존조차 이러한데, 그보다 사소한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 형태를 낳겠는가. 번식 매개 생물이 인간 하나를 제외하고 멸종해버린 은행나무조차도 꿋꿋이 살아남아 이 땅에서 번성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한 건 인간 또한 육체적, 정신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진화를 거듭한다는 점이다. 인신공양이 당연했던 고대의 인간과 복지가 보편화된 현대의 인간은 분명 다르다. 어떤 형식의 인신공양, 어떤 형식의 복지를 택했든 간에 그 모두가 살아남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혹은 진화의 과정에서 선택한 생존에 적합해 보이는 한 가지 갈래다.
그래, 살아남은 모두가 택한 방식은 옳다. 최소한 나무는 그렇게 증명하고 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그 이후의 문제다.
나무는 품는다. 자기 몸에 둥지를 튼 작고 미미한 생명들을 품는다. 자기 자신을 갉아먹고 살아가는 진딧물마저 품는다. 각 개체가 식물의 다양성을 상징하고 대표하며 다른 개체의 궁극적 진화 형태를 존중하고 품는다. 나무는 계절을 품는다. 따뜻한 봄바람을 품었던 그 넓직한 나무의 품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간다. 나무는 그 자체로 옮음을 증명한다. 그의 생존이 발하는 가치가 곧 그의 형태이다. 형태는 생존의 바탕이되고 생존은 형태의 목적이 된다. 서로가 얽히고설켜 쉴 그늘 하나를 마련한다. 그곳에서 쉬자, 나무가 만들어내는 덩굴 아래 그늘 아래에서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