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Kotaro Oshio
푸른 비단 끝단에 뿌려진 붉은 물감이 천천히 그 색을 하늘로 번져 올려 보내고 있다. 주황색이었던 것이 점차 노랗게 번져나가 초록색 선 하나를 가운데 두고 푸른색 비단과 대치한다. 비단은 점차 서편의 어느 한 지점으로 스르륵 흘러 내려가기 시작하고, 붉은 물감 한 방울을 바닷물에 톡, 떨어뜨린다. 파도 사이로 층층이 흐르는 붉은 물결은 낮 동안 잠잠했던 가로등에 스며들어 이내 전구 속 필라멘트를 가득 채우고는 주변 공기마저 붉게 만들어 버린다.
퍼져나가는 붉은 물감은 하루의 끝, 찰나의 시간밖에 볼 수 없는 특별한 황혼의 조각이다. 그리하여 보는 모든 이들은 특별한 그 끝이 화려하게 장식되기를 기대하지만, 막상 바라본 그 물감은 흘러간 시간에 대한 예우, 끝에 고하는 작별 인사 정도의 느낌을 줄 뿐이다. 화려하리라 기대받지만, 그저 고즈넉한 안정감을 제공하는 그 시간, 살아있는 모든 대상이 저물어가며 가지게 될 그 시간이 황혼이다.
고즈넉한 끝의 시간이지만 정적만이 흐르는 고요한 시간은 아니다. 천천히 흘러가는 물결 소리와 구름이 지나는 소리가 황혼의 시간을 함께한다. 비단이 스르륵 흘러 내려가는 소리는 바람이 되어 귓가를 맴돌고 서서히 제 할 말만 하며 뛰어다니는 귀뚜라미 소리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밤이 찾아오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 이들이 모인 곳에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와 조그마한 이야기 소리가 함께하며, 가끔은 맥주 한 캔을 함께하는 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치기도 한다.
황혼의 시간은 갑작스레 찾아오는 법이란 없다.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붉은 물감은 세상의 여명에도 묻어있다. 세상이 황혼으로 저물어갈 때와 같은 모양과 색깔로 여명 또한 떠오른다. 다만 이번에는 푸르게 변해갈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태양이 정확히 머리 위에 떴을 때쯤에는 이 물감이 어디로 갔나, 사라졌나, 하지만 그때가 곧 정점이다. 그 순간부터 사라진 줄 알았던 붉은 물감은 흰색으로, 노란색으로, 주황색으로, 마침내 붉은색으로 돌아와 다시 황혼의 색깔을 완성한다.
태양이 저물어 갈 때는 햇빛이 대기권을 통과하는 거리가 멀기에 파장이 짧은 푸른색은 금방 산란되어 없어져 버리고 붉은색 노을만 남는다. 그래서 노을이 붉은색이다. 푸른색 비단 끝자락에 묻어있던 붉은 물감은 그렇게 강한 파란색이 산란되어 없어졌음에도 살아남는다. 파장이 길어 이리저리 유연하게, 그리고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그 빛들이 모인다. 짧고 강하게 부딪히는 푸른빛들이 찬란한 하루의 정점을 밝게 비추는 동안 길고 유연하게 나아가는 붉은빛은 그 끝을, 그 황혼을 장엄하고 화려하며 고즈넉하게 장식한다.
장엄했던 시간의 끝을 고하는 황혼. 해가 지기 시작함을 느끼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황혼의 시작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정점의 그 순간을 시작이라 생각할 수도, 천천히 저녁노을이 지는 순간을 황혼의 시작이라 생각할 수도 혹은 온통 암흑뿐인 시간이 올 때까지 황혼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발버둥을 칠 수도. 그렇게 각자 자신이 써 내려간 역사에 황혼을 드리우게 된다. 고요하게, 고즈넉하게, 몸부림치며.
황혼의 시간이 품고 있는 단어들과 그 시간만이 말해주는 감정들이 있다. 시간은 저녁노을, 노년, 저뭄, 끝을 품는다. 저녁노을이란 단어에 아름다운 광경이라는 기대감이 묻어있다. 붉게 물드는 세상을 구경하기 위한 설렘도 조금은 품고 있고. 노년이라는 단어에는 아쉬움이 묻어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좀 더 잘했더라면,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과거에 대한 향수와 그에 대해 아쉬움이 흐른다. 저뭄이라는 단어에는 공포가 숨어있다. 이제는 정말 져버리는구나, 이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구나. 이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영원한 어둠만이 함께하는 걸까? 끝이라는 단어에는 단념이 남아있을 뿐이다. 끝이다. 발버둥 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끝, 안식,
저녁노을, 노년, 저뭄, 끝. 이 황혼의 단어들이 표현하는 감정은 오묘하다. 그 순간에 있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며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는 감정들이지만 아직 그 시간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다. 하루의,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는 이들은 그저 황금기가 영원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황혼의 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렇기에 그 시간을 헛된 발버둥으로 점철된 안타까운 시간으로 남길지, 노을이 표현하는 붉은 물감을 통해 장엄하고 화려하게 장식할지는 온전히 본인의 손에 달려있다.
안타까운 감정만으로 황혼을 보내기에는 아쉽지 않은가. 황혼과 함께 찾아오는 노을은 정말 최고의 장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아닐지라도 꽤 봐줄 만하게 아름답지 않은가. 붉은색과 푸른색 사이 애매한 색깔들이 이리저리 흩날리며 세상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그 노을에 나도 인사를 건네고 싶지 않은가. 그렇기에 지나감에 후회를 조금만 담은 채 마지막 불꽃을 장렬히 태우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기억에 한 조각이나마 남기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황혼의 시간이 지나갔더라도 여명의 시간은 돌아온다. 해가 지고 다음 날 새로운 해가 뜨는 게 당연하듯 언젠가 여명의 시간은 반드시 돌아온다. 언제, 어떻게 돌아올지, 푸앵카레 회귀 시간일지, 윤회 일지, 사후세계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 돌아온다. 아니, 그렇게라도 믿으며 황혼의 시간을 장식하면 멋진 끝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화려하게 지고 답게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