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에 대하여_

‘Beethoven’s 5 Secrets’, The Piano Guys

by 레드오렌지

이른 새벽이었다. 창문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찬 공기가 눈꺼풀 사이를 파고들어 약간의 시림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빨래를 말리기 위해 커튼을 모두 걷어놓은 까닭에 침대에 앉아있음에도 창문 밖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세상은 어둡고 사람들은 이불속에서 뒤척이고 있는 시간이었지만, 산 너머에서 고개를 빼꼼히 든 주황색 물감은 그 풍경에 녹아 방 안으로 은은히 스며들어왔다. 주황색 물감은 검은 하늘에 녹아 그 색을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했다. 여명이 밝아왔다.




잠에서 깨어난 우리는 시작을 본다. 세상을 밝히기 시작하는 태양의 모습을,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연스레 꺼지기 시작하는 가로등의 불빛을,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시린 아침을 시작하는 그 기분을 온전히 느끼며 그 모든 시작을 바라본다. 상쾌하며, 때로는 싫증을 내며 침대에서 벗어나며 여느 때처럼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여명이란 그저 매일 비슷한 시기에 다가오는 순간일 뿐이다. 잠을 자는 동안 사실상 죽어있던 우리에게는 그다지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 순간, 찰나.


긴 밤을 지나 아침으로 다가가는 사이에 맞이하는 여명의 주황색 빛깔은 그리 오래지 않아 흩어진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검푸른 하늘로 퍼져 녹아내려가는 주황 물감. 노랗게, 하얗게, 그렇게 남아있던 여명의 주황빛은 사라져 버린다. 주황색 물감은 여명의 끝과 함께 어딘가로 숨어버린다. 그 짧은 순간의 여명이 오지 않으면 하늘의 색깔은 변하지 않는다. 검푸른 어두운 색 만이 하늘을 가득 채울 뿐, 밝은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다. 결국 잠에서 깨어나 여명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은 차갑다. 이슬이 얼어붙어 서리진 풀들의 겉면에 드리우는 여명은 그제야 그 시린 얼음들을 녹이기 시작한다. 항상 따뜻하고 밝은 시작만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해보지만 영원한 빛의 세상은 곧 순환이 없는, 영원히 정적인 세상일 뿐이라는 생각에 단념한다. 자신을 보호하던 알을 뚫고 나오는 아기 새가 가장 처음 맞이하는 것 또한 세상의 차가운 공기인 만큼, 시작을 맞이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시림이 오로지 자신만 겪는 특별한 일이리라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일이다. 세상이 온통 식어버려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공간에 따뜻한 빛을 비추려는 자는 가장 먼저 시림을 느낄 수밖에.


그렇게 시림과 함께하는 시작은 설렘을 품는다. 지금은 차갑지만 언젠가 다가올 따스함과 결국 녹아버릴 서리에 대한 기대도 조금 섞는다. 그리고 그 설렘은 곧 어리숙함으로 변질된다. 찬기에 얼어버린 손과 발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신경 하나하나가 아직 온기를 찾지 못한 어리숙함에 이리저리 치이고 긁히며 상처를 입는다. 벌써 하늘에 해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여명은 흩어졌는데, 아직까지 나의 손은 왜 얼어있는가, 언제 따뜻해지는가? 라며 불가항력적인 추위를 내리는 세상과 그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한탄한다.


그러나 알아야만 한다. 여명으로 밝아온 태양은 반드시 천구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태양은 떠오르자마자 져버리거나, 지자마자 떠오르지 않는다. 정직하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올라갈 뿐이라는 것을. 시작에 흔들리지 않고, 끝에 후회하지 않으며 흔들리지 않고 천구의 한 경로를 흘러갈 뿐이다. 그렇게 태양은 서리 날리는 냉기와 풋풋한 설렘, 아직 온기를 찾지 못한 어리숙함을 딛고 묵묵히 걸어가다 반드시 정점을 만나게 되고, 시작과 함께했던 주황 물감을, 황혼을 다시 찾게 된다.


여명에 묻어난 주황 물감은 세상이 밝아졌을 때 잠시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황혼의 시간이 다가오면 모습을 드러낸다. 황혼의 주황색과 여명의 주황색은 결국 같은 존재로부터 번져 나온 셈이다. 이렇듯 모든 시작은 그 출발과 동시에 끝을 포함한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예고하고, 벚꽃은 피어오름과 동시에 저뭄을 기대하게 한다. 하물며 무거운 원자핵을 가진 방사성 원소들도 그 형성과 동시에 붕괴를 시작하지 않던가. 시작은 끝과 함께한다. 이것을 어기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먼 훗날, 반드시 찾아올 황혼에 우리는 무엇을 회상하겠는가. 우리가 떠올릴 것은 기억뿐이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경험뿐이다. 여명의 순간, 그 차가웠던 시작이 있었기에 분명 황혼을 만날 수 있었다. 끝없는 잠 속에서 사실상 죽어있던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한 것은 바로 여명이었다. 그 차가웠던 하루의 시작 또한 기나긴 스스로의 역사의 한 부분이 되어 황혼의 시간에 회상될 테다. 그렇게 여명과 함께했던 시린 추위와 설렘, 어리숙함을 가슴 한편에 품고 가올 정점을 향해 뛰어오르라. 언젠가 다가올 황혼에 품고 있던 주황 물감을 가득 태워 올려 보내라. 그리하여 시리게 시작하여 뜨겁게 타오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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