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 꿈 #2. 천사와 악마

by Redpanda

두 번째 꿈은 10살 때 꾼 꿈이다. 당시 나는 신앙이 깊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할머니에게 심적으로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당시 내 안에 숨어있는 두려움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삶 자체가 신앙인 분 이셨지만 내게는 한번도 이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거 다행이네 본인 신앙 강요안하고 존중해주니하겠지만 10살배기에겐 그것이 공포였다. 할머니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셨고(아닐 수도있다 물론) 개인주의적 사상을 가진 현대의 젊은이도 아닌 가족 제 1 우선의 할머니가 넌 너고 난 나야 라는 분리를 할 수있다는게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을 읽고 계신 할머니한테 가만히 다가가, 할머니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라고 물어보면 물론이지 라고 대답하셨고, 걱정이 된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라고 덧붙여도 그럼. 이라고 짧게 대답하시고 다시 바쁘게 성경을 읽으셨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토록 예뻐하는 장손녀에겐 신을 믿으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물론 내가 신을 믿지 않는건 아셨다.


그렇다면 할머니 생각에서 나는 지옥에 갈 사람인 건데 개의치 않고 천국으로 가는 길을 홀로 묵묵히 걸어가시는게 무서웠던 것 같다.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내 옆에 이토록 열심히 믿는 분이 계시니 나는 끊임없이 혹시나하며 신의 존재를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할머니에게 세상이란 하나님에게 가기 위해 필요한 단계이자 어쩔 수 없는 고통의 페이지구나, 그럼 할머니에게 나는 뭘까…? 지옥 속을 헤메이는 또 하나의 불쌍한 인연, 나 아닌 사람, 남일 뿐인가 싶었다.


게다가 당시의 시대상은 세기 말적 혼란과 뉴밀레니엄의 낯설음이 뒤섞여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종말론적 불길함과 새천년의 기대감과 걱정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예능방송이 끝나고 나오던 hot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놀라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엄마에게 달려갔던 적도 있었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짙은 아이라인을 칠한 사신같은 남자들이(어린 내 눈에 비친 hot) “아이야!!!!”를 외치며 기다란 손톱을 휘두르는 모습은 아이(나)를 질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사신이고 세상이 저주받는 것만 같았다. 분위기가 궁금할 분을 위해 뮤직비디오와 가사 일부를 첨부한다.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게 누가 허락했는가
언제까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고 살텐가-

(중략)

이제 새 천년이 다가온다 no lie
우린 필요에 따라 복제되버릴지도 모르지(yo Clon yourself)'


얼마 지나지 않아 가수 이정현이 대세를 타며 역시 무서운 눈알이 그려진 부채를 흔들며 귀신이라도 씌인듯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그녀의 독기에 가득찬 눈은(물론 퍼포먼스지만) 온 세상에 저주를 내리는 것 같았고 세상이 이대로 가다간 소돔과 고모라처럼 벌 받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게 잘 못되었고 싹 다 바뀌어야한다는 그녀의 강렬한 외침과 함께 테크노가 유행했고 온갖 방송에서 미친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줄을 놓는 20대를 비췄다.

그녀의 노래는 무척 새로워 거부감을 일으키면서도 중독성이 엄청났다. 좋은데 좋아해도 되는가 혼란스러웠고 할머니 앞에선 더더욱 인정하기 어려웠다. 이런 노래가 나오는 티비를 멍하니 보고있으면 할머니는 세상이 어찌되려고 귀신같은 것이 티비에 나오나 진지하게 걱정하셨다. 그러면 나는 별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녀의 퍼포먼스에 매혹되는 내가 타락하고 있다는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할머니(신앙세계)로 대변되는 선과 세속에 매혹되는 나로 대변되는 악의 갈등 구조가 내 마음속에 싹트고 있었다.


어느날 꿈 속에서 처음보는 여자아이와 내가 함께 거실에 앉아 놀고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 뒤의 쇼파에 앉아 조용히 성경책을 읽고 계셨고, 방안은 눈부신 햇살로 가득했다. 우리는 피아노건반 모양을 한 우리집 전화기로 건반을 치며 놀고 있었는데 나는 문득 이 놀이가 시시하고 재미없다고 느꼈다. 그 순간 할머니와 그 아이가 동작을 멈췄고 사라졌다. 빠른 속도로 구름이 이동하며 햇빛이 사라지고 방안이 푸르스름해지더니 순식간에 껌껌한 밤이 되었다.


방안에는 아빠와 나, 그리고 내 등짝만한 커다란 검은 가재가 있었다. 가재는 선의 세계를 심심해하다 신에게 버림 받은 듯한 나를 비웃듯 내 등짝으로 단번에 뛰어올라 머리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나는 겁에질려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빠는 요지 부동으로 어둠속에서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아 인생은 혼자인 것!) 가재를 떼기 위해 바닥위를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흔들어도 가재의 조임은 점점 거세지기만 했다. 결국 내가 애걸복걸하며 아빠의 발목에 매달리니 그제야 아빠는 탐탁치 않은 손길을 뻗었고 그때, 꿈에서 깼다.


새벽 5시. 방안은 컴컴했고 작은 방의 열린 틈새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할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성경을 읽고 계셨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서 할머니 옆으로 가 가만히 앉아 숨을 골랐다. 내가 신을 믿지 않아, 그 세계를 솔직히 재.미.없.다.고 생각해 신이 꿈에서 경고한건가 까지 생각하던게 기억난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할머니는 많이 예뻐하실테니 그런 할머니 옆에 있으면 당장은 잡혀가진 않을 것 같아 그 옆에 한참을 꼭 붙어있었다.


내가 신을 믿을 수 없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다 차치하고 사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이미 세상을 떠난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나는 몇번의 작별을 겪었고 그들은 흔히 말하는 천국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신을 믿으면, 그들이 지옥에 갔다고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그들이 그저 편안하리라 믿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리라 믿는다.


사실 할머니는 오랜 세월 신을 전하려는 시도를 많이 해보고,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바뀔 수 없다는 걸 이미 받아들이셨던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란 청개구리는 그때 당시 할머니가 하나님을 믿어라!라고 하셨으면 오히려 더 무심하게 흐응?하며 귓등으로도 안 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래라 저러라 한마디 없이 본인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신게 나에겐 더욱 더 신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으니 할머니는 참 현명하게 사신 분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길을 묵묵히 가며 다른 일에 방해 받지 않았고, 다른 이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깊숙히 영향을 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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