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6. 바투어 화산 일출 트랙킹(하)
*혹시 제 글을 읽고 바투어 트랙킹의 난이도를 고민하는 분들께 도움이 될까 하고 높이와 최근 활동 정보를 찾아보았습니다.
관악산 632m
한라산 1,950m
바투어(바뚜르, 바투르) 1,717m, 최근 활동: 2000년
아궁 3,031m, 최근 활동: 2018년 7월, 현재 출입통제 중
공포로 구부러 든 무릎으로 어정어정 자리에 앉자 자비에가 웃으며 어깨를 툭툭 쳐주었습니다. 그제야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어 눈부신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름이 발 밑에 푹신하게 깔려있고 그 위로 원숭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어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구름 아래로 넘실대는 황금빛 바닷물과 땅 위에 오종종 박혀있는 마을들이 온통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맞은편에서 태양이 막 세수한 듯 말간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구름 위를 우뚝 뚫고 올라온 벌거숭이 화산 위에 작은 먼지처럼 앉아서 함께 금빛으로 뒤덮였습니다. 가슴속이 무언가가 함께 차오르는 느낌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내쉴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해가 다 뜨고 난 즈음엔 점점 차갑게 식는 체온에 양팔을 비비며 일어나 장난기 넘치는 원숭이들과 사진을 찍다가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정말 다행히도 내려오는 건 훨씬 쉬웠습니다. 내려갈 땐 잘못 디디면 나락으로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것 같진 않았거든요.
중간중간에 가이드 분이 특징적인 화산지형 곳곳을 안내해주어서 신기한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뜨거운 증기가 나오는 분기공을 발견할 때면 후후 불고 훅 올라오는 증기에 아이처럼 박수를 치고 좋아했습니다. 어두울 때 올라와서 잘 몰랐는데, 내려오면서 보니 산세가 정말 웅장했습니다. 2000년에 용암이 분출되고 현재는 안에서만 끓고 있다는 거대한 화구는 어찌나 넓고 깊은지 나무가 풀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자라고 있고 증기가 올라오는 바닥은 끝까지 들여다보기도 어려웠습니다. 다들 길게 목을 빼고 여러 각도에서 빼꼼히 들여다 보고들 있는데 가이드분이 일전에 누가 셀카를 찍다가 떨어져서 죽었다며 조심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찾아보니 정말 안타깝게도 2010년에 스물다섯 살의 스웨덴 청년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려올까 하고 열심히 내려오고 또 내려왔건만 당최 끝나지 않는 기분이었습니다. 발걸음을 한번 내딛을 때마다 회색의 뿌연 먼지가 펄럭 펄럭 일어서는 통에 다 내려올 즈음엔 온몸이 재투성이였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맡던 익숙한 모래먼지 냄새가 났습니다. 기분 좋은 피로감에 다 죽어가면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모두 먼지투성이가 되어 굴러내려가고 있었는데, 현지인 분들이 그 가파른 산세를 오토바이로 오르시는 걸 보고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역시 현지인은 다릅니다. 가이드분들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어찌나 에너지가 넘치던지 비결이 뭔지 물었더니 일주일에 여섯 번씩 오르면 된다더군요. 잘못들은 줄 알았습니다.
까도 까도 매력이 끝이 없는 양파처럼 바투어산도 내려올수록 새로운 매력의 산세를 선보였습니다. 거의 다 내려올 즈음엔 호수처럼 빛나는 바다와 드넓은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볼 법한 절경에 반지원정대가 된 것 같았습니다.
픽업차량을 기다리며 영혼 없는 얼굴로 앉아있는데 옆자리에 와서 앉은 자비에가 물었습니다 기억도 잘 안나지만 앞으로 가고 싶은 곳이 겹치는 거 같으니 같이 갈래?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희미하게 웃으며 살아남으면 뭔들 못하겠니 그러자꾸나 했습니다. 원래는 돌아오는 길에 커피농장을 들리는 일정이어서 차가 한 차례 커피농장 앞에 멈췄습니다. 우리 차량의 가이드 분은(제 구원자 분!) 혼신의 힘을 다해 죽은 척하고 있는 재투성이 좀비 떼를 잠시 초롱초롱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혹시 숙소로 바로 가고 싶은지 물어보셨습니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 “제발 그냥 숙소로 보내주세요”를 외치고 죽음 같은 수면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중간에 먼저 도착한 다른 숙소 사람들을 내려주려고 차가 또 한 번 더 멈췄습니다. 근데 잠에 취한 우리 숙소 친구 하나가 자리를 비켜줘야 그분들이 내릴 수 있어서 깨웠더니, 여기서 내리라는 줄 알고 일단 내려서는 잠이 덜 깨어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에 모두 한바탕 웃었습니다. 여기 아직 아니라고 다시 그 친구를 주워서 드디어 숙소로 왔습니다. 아, 문명이여!
뜨거운 물로 샤워하며 묵직한 피로와 화산재를 뽁뽁 씻어낸 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침식사를 먹었습니다. 다들 계획했던 일정이고 뭐고 오늘은 쉬기로 의기투합했습니다. 함께 그 고생을 하고 올라가 엄청난 장관을 나누고 나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정겨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로 사진을 공유하다가 산 위에서 얼마나 초췌했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또 웃음이 터졌습니다. 점프샷 찍어 달랬더니 머리는 날려버리고 몸만 찍혀있다던가, 영혼이 다 빠져나가서 눈에 초점이 없는데 입은 세상 인자한 거짓 미소를 짓고 있질 않나 도대체가 제대로 나온 사진이 없었습니다.
무턱대고 발리에 올 때만 해도 ‘몰디브에서 모히또 한 잔?’ 정도나 생각했지 이렇게 야밤에 화산을 기어오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죠. 드디어 발리에서 하고 싶은 일의 첫 가닥을 찾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배낭여행으로요.
그날 아침 구름 위를 뛰어다니는 원숭이 떼와 함께 본 일출은,
갑자기 신선이 튀어나와도 “오셨어요?”라고 태연히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