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

발리에서 생긴 일#7.Feat. 방향치의 변론

by Redpanda

밤새 산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날. 사실 무언갈 하기엔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덕분에 또 다른 여행 스타일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취향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니 저 혼자였으면 안 해보았을 일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날처럼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란 몇 년 전 제가 본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해외여행을 할 때 주어진 시간이 참 짧고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빡빡하게 돌아다니는 편이었습니다. 저는 몸이 편한 여행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하고 아직 팔팔한 지금은 배낭 메고 많이 돌아다니는 여행이 좋았습니다. 좀 사서 고생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인지라. 싼 물가에 마사지를 잔뜩 받고 네일 받고 머리하고 누워서 풀 서비스를 받는 휴양 여행은 아직은 별로 끌리지 않았습니다. 근데 이건 개인의 취향이고 워낙 인건비가 싼 발리이기에 저렴한 마사지를 최대한 많이 받고 푹 쉬다가 가는 직장인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좋은 건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미리 조사도 많이 해서 여행을 가 곤 했습니다. 근데 막상 제가 찾은 정보가 현지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서비스라 찾을 수 없을 때도 있었도 했고, 블로그에서 본 맛 집을 찾는 과정 자체가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어쩌다 한 번씩 오늘은 정말 맛이 인증된 곳에서 점심을 먹어야겠어라는 마음이 드는 경우가 아니라면요. 뭘 놓치면 얼마나 놓치겠나 이게 다 내 여행의 흐름인 것을 하며 그저 제 발 가는 대로 걷다가 좀 눈길이 가서 들어가서 먹어보면 나중에 알고 보면 유명한 곳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래도 정보의 홍수 속에서 너무 애쓰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내려놓고 사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간도 좀 여유가 있고,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다녀간 곳에서 여행을 하는 거라면, 현지에서 선택지를 보고 계획을 세워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머무는 숙소에 있는 직원들이 좋은 레스토랑이나 마사지샵, 볼만한 곳을 잘 알고 있어서 손쉽게 주변에서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머문 숙소에선 우붓에서 갈만한 곳을 지도로 만들어서 나눠주었었고, 두 번째 숙소에는 그동안 매니저&여행객들이 가보고 맛있는 곳을 리스트업 해놓은 종이를 나눠주었습니다. 그 종이에서 숙소 바로 200m 앞에 괜찮은 현지 식당이 있다길래 슬렁슬렁 점심을 먹으러 가보았습니다. 한낮의 끈질긴 열기 속에서 벼 모종들이 자라나는 논밭을 끼고 빼꼼히 숨어있는 가게였습니다.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손님이 오면 밥도 파는 것 같았습니다. 뜨거운 닭국물과 밥, 아보카도 주스를 먹었는데, 2800원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맛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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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저희는 숙소 풀장에 늘어져서 수영을 하다가 커피를 마시러 나섰습니다. 발리에선 많은 여행자들이 스쿠터를 대여해서 돌아다니는데, 사실 저는 소문난 쫄보라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던 선택지입니다. 근데 이미 세 명의 친구가 스쿠터를 대여해놓은 상태라, 나머지 넷은 그 뒤에 얹혀서 출발했습니다. 무슨 커피 마시러 가는데 스쿠터까지? 란 생각을 했지만 타보니 왜 다들 대여하는지 알겠더군요.


발리는 낮에 날씨가 굉장히 더워서 밖에 나가는 순간 축축 늘어지는데, 스쿠터를 타니 쌩- 하고 순식간에 우붓 중심거리를 몇 바퀴도 돌았습니다. 왜 몇 바퀴나 돌았냐고요? 저희 스쿠터가 앞에 차를 먼저 보내주는 사이에 앞서 가던 친구들을 놓쳤거든요. 생각해보니 서로 인스타만 알지 번호를 몰라서 잠시 연락이 안 됐고 샘이 근방 어딘가 멈춰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브람이 주변을 돌아보자 제안했습니다. 저야 그저 좋았답니다. 더운 날씨에 개미처럼 걸어 다니다가 스쿠터에 타니 신세계에 감격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시원하고 빠르고! 문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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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변에서 샘 일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처음에 우측이 아니라 좌측으로 꺾어야 했나 하며 구석구석 드라이브 겸 돌았습니다. 보통 뒤에 탄 사람이 인간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저는 방향치입니다. 네, 그 지도 볼 때 고개를 학처럼 90도로 좌우로 돌려가며 해독해야 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한번 간 길은 잘 찾는 걸 보니 완전 길치는 아닌데, 지도를 잘 못 봅니다. 일전에 누군가에게 방향을 물었더니 ‘핸드폰에 지도 없어?’라며 길치의 가슴에 비수 같은 말을 날리더군요. 그땐 당황해서 어버버하고 대답하지 못했지만 여기 길치의 변이 있습니다. 물론 지도는 있지만 대체 방향을 모르겠습니다. 맥도널드처럼 눈에 띄는 지표가 근처에 있으면 지도에도 뜨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지도에서 보이는 좌측이 제가 보는 좌측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아 그럼 현재 위치를 중심으로 방향을 잡아주는 기능을 켜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네 그거 잘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터넷이 불안정한 곳에선 GPS도 함께 갈팡질팡 제정신을 못 차리곤 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차 위에서 한 발씩 늦거나 바로 옆으로 가면 될 것 같은 길을 빙 돌아가라고 농락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 물론 이 모든 것은 길치의 변입니다. 머릿속에 방향센서가 제대로 있는 분들은 지도를 딱 보면 아 알겠다. 하며 다시 안 보고도 걷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평생 산 집이 남향인지 동향인지 알아채지 못하고 사는 게, 또 거기서 전혀 불편함을 못 느끼는 게 방향치입니다. 저희 아빠가 이 사실을 알고 경악하며 해가 이쪽에서 뜨고 저쪽에서 지잖아!라고 말할 때야 누군가는 그런 걸 생각하며 산다는 게 오히려 놀라웠습니다.


일전에 인터넷에서 ‘길치가 아닌 사람이 길을 걸을 때 보는 세상과 길치가 보는 세상’을 비교해 놓은 걸 보았습니다. 길치가 아닌 분들은 걸을 때 아 왼쪽 이층에 은행이 있네… 그 앞엔 사거리구나 이런 걸 본다면, 길치분들은 음 오늘은 왠지 하늘이 좀 노란 느낌! 이런 생각을 하며 걷는다구요. 네, 맞습니다! 제 머리란 건 언제부턴가 팩트 거름망이 된 듯 팩트는 물처럼 그물망을 빠져나가고 인상만이 건더기로 남더군요. “그거 진짜 좋았어! 반전이 대박!”이라고 말해놓고 순간 어떻게 반전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나는 식입니다. 그저 엄청 스릴 있었다!라는 인상만 기억에 남은 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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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포레스트 부근


길치의 변은 이쯤 해두고, 브람에게 말했습니다. 미안한데 나 지도 잘 못 본다. 껄껄.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마.

계속 반 박자 늦게 알려줘서 들어갈 곳을 놓치다가, 나중에는 결국 인간 핸드폰 거치대가 되어주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고 팔을 앞으로 쭉 뻗어 핸드폰에 뜬 지도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부끄러운 거 알지만 최선을 다 했으니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헤매는 과정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깊숙이 들어갔다가 닭과 병아리들이 오종종 걸어 다니는 조용한 언덕배기 시골길로 들어섰는데, 마음 따뜻한 미소가 절로 피어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브람에게 말했죠. 네가 지금 내 얼굴을 못 봐서 다행이라고. 사실 이 모든 게 너무 신나고 좋아서 줄곧 이유 없이 미친 사람 마냥 웃고 있었다고요.


다행인 건, 그동안 제가 개미처럼 우붓을 걸어 다니며 핵심적인 지리를 익혀 둔 게 있어 몇 번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길이 서로 연결된 게 아니라, 좌측 블록으로 넘어가고 싶으면 위로 한참 올라가야 좌측으로 들어갈 수 있다던지 하는 것이요. 브람이 감탄하는 걸 보고 이 방향치는 너무도 뿌듯했답니다. 혹시 도움이 되실까 해서 숙소에서 받은 우붓 지도는 맨 아래에 첨부합니다.


뭐 여차하면 우리 둘이 마시는 거지 뭐. 할 즈음 자비에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몽키 포레스트 근처 골목에 있는 채식 식당으로 주렁주렁 치렁치렁 내려온 나뭇잎을 커튼처럼 휘날리며 시원하게 달렸습니다.



*첫 번째 숙소에서 받은 지도입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실 때 참고가 되실까 하고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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