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우면 그리워하세요

발리에서 생긴 일#8. 명상센터에 갔습니다.

by Redpanda

발리에서는 커피를 내릴 때 필터를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다 보면 고운 갈색의 원두가루가 바닥에 진하게 침잠해있어서 이걸 마셔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남겨두는 건지 혼란스러웠습니다.


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며 한 숨 돌리고 나자 일행이 나뉘었습니다. 자비에는 명상을 시도해보고 싶어 찾아놨다기에 저는 거기에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아까 풀장에서 새로 만난 독일 친구 엘도 함께하기로 해 셋은 명상센터를 향했습니다. 나머지 일행은 마사지를 받으며 피로를 풀겠다며 숙소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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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할 정도로 최근 일 년간 명상에 호기심을 갖게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린 나이가 무색하게 이렇게 성숙할 수가 있나 놀랍던 룸메이트, 에스더가 그 첫 번째였습니다. 밤이면 늘 넷플릭스 등을 보며 스크린의 세계에 빠져있는 저와 달리 그저 가만히 누워 명상을 하곤 하던 에스더를 보며 처음으로 저렇게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야 다른 누군가와 한 방을 써본 게 처음이라 룸메이트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제가 어떻게 사는 사람인지를 되돌아보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기한 정도였지 대체 어떤 식으로 명상을 하는지 물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다음으로 호주에서 만난 직장동료 라비나가 있습니다. 얼결에 라비나가 새로 시작한 짐에 따라갔다가 운동을 같이하게 되면서 출근도 함께 하게 되었고, 점심도 같이 먹다 보니 깊은 대화까지 나누곤 했습니다. 제가 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라면 그녀는 현재 제 자리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안정감 있게 살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 사업이 승승장구하며 큰돈을 벌었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던 라비나는,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삶의 철학을 수립한 친구였습니다. 라비나는 늘 새벽 4시면 일어나서 명상을 한다고 말해, 지각하지 않을 마지노선에야 겨우 몸을 일으키던 제게 문화충격을 주었습니다. 대체 어떤 동기부여가 돼야 새벽 4시에 따뜻한 침대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는지 궁금해서 대체 어떻게 명상을 하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친구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극찬하기에 보게 되었습니다. 수년 전엔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보다가 멈춘 영화였는데 다시 보니 설명하기 어려운 울림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어보기로 했죠. 이 책은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회고록입니다. 어느 날 그녀는 사실 지금껏 애써 만들어온 결혼생활도 아이를 갖는 것도 다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란 걸 깨닫고 깊은 혼란과 죄책감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걸 다 잃고 떠난 여정에서 다시금 즐거움과 나 자신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균형을 찾습니다. 책의 두 번째 파트인 인도 편은 명상과 고군분투하는 저자의 심경 변화를 자세히 담고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 할 수 있는 정신영역의 묘사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지만 책 때문에라도 명상에 관심이 생긴 상태였습니다.


책 속에서도 나오듯이 의외로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있기란 굉장히 힘듭니다. 특히 끊임없이 외부 자극에 노출되고 부지런히 반응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면요. 대부분의 현대인에 이에 해당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자면 오만가지 의식의 흐름으로 빠져들기 십상입니다. 이를테면 눈을 감은 지 몇 초도 안 되는 사이에 ‘아 저번에 써본 립스틱 색 괜찮던데 세일 끝나기 전에 하나 사야겠다. 근데 이번 달에 이미 너무 많이 쓴 거 같은데… 예전에 안드로이드 쓸 땐 돈 쓸 때마다 자동으로 가계부 작성이 됐는데 아이폰은 안돼서 불편하단 말이지. 이번에 배터리 교체 서비스 짜증스러웠던 것도 그렇고… 다음엔 정말 다시 안드로이드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 근데 그럼 에어 팟은 어떡하지? 어 그러고 보니 샘 스미스 신곡 좋던데’까지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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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제대로 시도해보자 하고 그렇게 명상센터를 찾았습니다. 숲길을 가려진 골목으로 들어서니 긴 계단이 나왔습니다. 근육통이 작렬하는 다리 때문이라도 계단이 나타날 때마다 헉했지만 기대되었습니다. 비밀의 정원처럼 다양한 꽃과 풀로 잘 가꾸어진 공간에서 일 회치 수강료를 내고 올라가 보니 탁 트인 명상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나이 때가 꽤 있는 노부부와 젊은 여행객까지 올라오고 모든 자리가 채워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명상을 도와주실 선생님이 올라와 기도를 마치고 본격적인 명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정좌를 한 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셨습니다. 놀랍게도 라비나가 늘 누누이 말하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라비나는 늘 저에게 눈을 감고 신체의 감각을 느껴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아 내가 지금 다리를 꼬고 있어서 눌려있는 오른쪽 다리가 좀 저릿저릿하구나. 날이 추워 발끝이 시리는구나. 어깨가 살짝 결리는구나. 이러한 신체의 감각에 귀를 기울이고 느끼며 이해해주며 호흡을 한다고요. 생각해보면 우리 신체가 어떤 느낌을 느끼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선생님은 신체의 감각을 곰곰이 느껴볼 것을 알려준 후, 주변부의 소리와 냄새를 인지하라고 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새소리와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달려가는 소리, 저 멀리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공기 중에 옅게 섞여있던 꽃냄새와 향냄새도 코 꽃을 간질였습니다.


그저 편안하게 현재 내 몸이 보내는 감각을 느끼고, 나를 둘러싼 환경에 귀 기울이며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요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의 후회도 잠시 접어두고 잠시라도 현재를 사는 것만 해도 굉장히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시더군요. 매일 잠시 잠깐이라도 이러한 시간을 가지라는 당부와 함께 오랜 적막을 깨고 저녁 명상은 끝났습니다.




라비나는 화가 날 때면 이를 떨쳐내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단 음식을 먹지 말고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 마쉬며 내가 화가 났다는 감정을 느끼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이 외치는 소리가 계속 무시당할 때 그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쌓여 이상한대서 화풀이를 하거나 스스로에게 화가 날 것이라고요. 읽고 있던 책에서 길버트는 인도의 사원에서 동료에게 비슷한 조언을 듣습니다. 그녀가 헤어진 남자 친구가 너무 보고 싶다고 고통을 토로하자, 동료는 그럼 그리워하라는 말을 합니다. 경종을 울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미 끝난 사랑이지만 내 마음이 끝나지 않아 오래도록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개의 경우 그 감정을 잊고자 주의를 빼앗을 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일에 미치던가, 술을 마시던가, 드라마나 영화, 게임에 미치던가 하며 자신을 바쁘게 만들어서요. 그 이유는 아픔을 온전히 마주하자니 엄두가 안 나서 그쪽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 생각납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마치 없던 일처럼 기억에서 삭제시켜버리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로 일절 그 일에 대해 언급을 안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일부러 끄집어내지 않는 이상 생각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근데 그런 식으로 해서 제 마음의 상처가 나았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상처 받은 순간의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분노로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새어 나오고 맙니다.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화끈하게 아픈 걸 보면 덮어둔 상처는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의 회피는 결국 두고두고 나쁜 영향을 줍니다. 타인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던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에 애먼 사람에게 벼락같이 쏘아붙이게 되는 식으로요.


그래서 생각합니다. 명상이란 게 대단한 게 아니라, 순간순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잠시 멈춰서 돌아보는 쉼표 같은 것이라고요. 슬플 땐 슬픔을, 그리울 땐 그리움을, 화가 날 땐 그 화를 용기 내서 마주하고 느낀다면, 의외로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폭발적이던 감정이 조금씩 편안하게 가라앉습니다. 마음이 아프실 땐 피하시기보다 잠시 혼자 앉아서 내 마음이 많이 아프구나 살펴 주시며 눈물을 흘리셨으면 해요. 우리 마음은 어린아이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어린아이는 연약하지만, 의외로 어른들보다 용감하고 씩씩하듯이, 관심 어린 시선과 보살핌 안에서는 우리 마음도 씩씩한 아이처럼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서리라 믿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한 시간의 명상으로 인생의 큰 깨달음을 이라던 지 방향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앞 서 말씀드렸듯이 늘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살다가 나 자신과 덩그러니 마주하고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해 혼났습니다. 평소엔 노래 틀어놓고 책 보면서 간식도 집어먹고 간간히 옆 사람과 대화도 하며 핸드폰으론 필요한 물건도 살 정도로 많은 것들에 주의를 분산하며 사니까요. 해가 다 져서 어둠이 켜켜이 쌓인 명상실의 불이 켜졌습니다. 세 시간 같은 한 시간의 휴식을 취한 느낌이었습니다.


명상실을 조용히 빠져나오던 저희 셋은, 주위에 듣는 사람이 없을 정도까지 걸어 나오자 동시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우리 지금 돈 주고 한 시간 숨 쉬다 나온 거냐면서요. 뭔가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진 않았지만 유쾌했습니다. 돈 날렸다는 불쾌감 대신 대체 뭘 한 건지가 마냥 웃길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발걸음은 계단이 아무리 나와도 날아갈 듯 가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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