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9. 가지 않은 길이 아쉽다
다음 날 저희는 숙소를 통해 기사님을 고용해서 주변 관광지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정말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었는데, 멀어서 그곳만 따로 보는 수밖에 없다는 말에 잠깐의 고민 끝에 주변부를 여러 군데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관광지를 코스별로 찍는 여행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시간도 있겠다 하루쯤은 슬렁슬렁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엄청났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저희가 들렀던 곳들은 딱 전형적인 관광지였습니다. 층층이 계단식으로 펼쳐진라 초록의 논밭은 보고 있기만 해도 두 눈이 시원해지는 모습이었지만 천천히 걸으며 사색에 잠길 수 있다던가 하는 실질적인 경험은 어렵달까요? 쓱 보고 사진을 찍고 나면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고 아무래도 기사님이 기다리고 있기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자연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겠다고 논 길을 좀 걸었습니다. 그때 농부로 보이시는 분이 물 지레를 한 번 저보고 싶냐고 해 신기한 마음에 들어봤습니다. 혹시 눈치채셨나요? 그분은 진짜 농부가 아니라 농부처럼 옷을 입고 물지게를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한번 져 보게 하고 돈을 받는 '일'을 하던 겁니다! 친구들은 오히려 제가 상술인걸 몰랐다는 데에 놀라워해서 저야 말로 놀랐습니다.
논두렁에 서 있는 농부도 페이크인 것이 어째 실제 논밭이 아니라 잘 꾸며진 사진 촬영지 같았습니다. 라이스 테라스 테마파크 같았달까요. 분명히 진짜 라이스 테라스인데 미스터리 하게도 무언가 인위적이고 진짜 같지 않은 수상쩍음이 있었습니다. 이후로 다른 곳에서도 라이스 테라스는 자주 봐서 굳이 이때 안 가도 됐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저곳에서 예쁜 그네를 설치해서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는 곳을 많이 봤는데, 특히 라이스 테라스를 배경으로 설치한 높은 그네가 관광객 사이에서 유명합니다. 작정하고 3m까지 늘어지는 긴 원피스를 준비해 와 인생 샷 찍어가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다음 코스로 루왁커피 플랜테이션에 들렸습니다. 루왁커피가 사향고양이의 소화기관을 거친 원두로 만들어진다는 건 학창 시절 영어 지문에서나 읽은 게 다라 대체 어떤 식으로 수거되고 만들어지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철조망으로 된 케이지 안에 축 늘어져 있는 사향고양이를 보자 줄곧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조망 아래로 고양이의 배설물이 떨어져야 쉽게 모을 수 있기에 그렇게 사육된다고 들었습니다. 철조망 바닥 위에서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제 발바닥이 다 저릿저릿했습니다. 이렇게 까지 해서 마셔야 할 커피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물은 물이요 사원은 사원이 다하는 느낌으로 사원들도 둘러보았습니다. 더위에 찌든 몸을 식힐 생각에 종일 고대하던 폭포는 자유롭게 놀 수 있는 폭포가 아니어서 아예 안 들어간 친구도 있었습니다. 몇 미터 못 들어가고 안전상 진입금지 라인이 있어 그저 몸만 적실 수 있었거든요. 그래도 타이밍 좋게 해 지는 폭포 옆에서 빛나는 무지개가 줄곧 걸려있는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는 시원한 물속으로 들어갔답니다. 강력한 폭포의 힘에 출렁이는 물속에서 진입금지라인을 양손에 잡고 차가운 물속에서 포슬포슬 부서지는 물살을 맞다가 나왔습니다.
결론적으로 투어는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없어 아쉬웠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멀리 있어도 꼭 가고 싶던 곳을 한 군데 제대로 가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쿠터를 대여했다면 도중에 자유롭게 경로를 변경했을 텐데 이미 벌어진 것을 어쩔 수 없다 했습니다.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하며 애석해하기엔 이미 늦었으니까요.
좌측 사진은 가지 않은 길이라 애석하게 마음에 남은 곳인 렘푸양 사원입니다.
발리의 건축양식은 독특한 모양새의 대문을 가지고 있는데, 마치 크리스마스트리를 반으로 쪼개서 양 옆으로 슬쩍 떨어뜨려 놓은 듯 생겼습니다. 렘푸양 사원에 가면 정말 거대한 크기의 발리식 문이 서있는 걸로 유명합니다. SNS 채널을 보면 마치 소금 호수가 하늘을 그대로 반사하는 것처럼 바닥의 물이 하늘을 그대로 비춰주는 사진이 많은데, 사실 물은 없고 사진에서만 반사판을 씌워서 물이 있는 것처럼 찍어주는 거라지만 그래도 이왕 사원을 들려보실 거라면 렘푸양이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역시 여행지에서는 좀 고생을 해서 깊숙이 들어가야 그 가치에 걸맞은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다행인 건 지루한 영화도 친한 친구와 보면 개그가 되는 것처럼 함께 하는 친구들이 좋아서 내내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차에서 서로 각자의 언어로 된 노래를 선곡해서 소개하기도 했는데, 처음엔 생소하게 들렸던 독일 노래는 나중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어찌나 신나던지 이후로도 찾아들었습니다. 프랑스계 캐나다 지역인 퀘벡 출신의 자비에는 퀘벡 출신 디바, 셀린 디온의 노래를 선곡했습니다. 불어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셀린 디온이 부른다는 데서 다 했습니다. 나중에도 셔플로 이때 함께 들은 노래가 튀어나오면 차 안에서 함께 웃으며 보던 초록의 숲길과 따뜻한 햇볕이 돼살아나서 씩 웃곤 합니다.
독일 친구 L의 추천곡: Wohin willst du _ Gestort aber Geil, LEA
자비에의 추천곡: On ne change pas _ Celine Dion
그런데 이걸 어째.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ATM에 들렸다가 자비에의 카드가 기계에 먹히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아주 자비에의 수난기였습니다. 처음 ATM는 고장이라 다른 ATM기를 찾아갔는데, 첫 ATM기에 휴대폰을 두고 온 걸 알고 전력 질주해서 다시 찾아오질 않나, 두 번째 ATM기에 카드가 먹히질 않나,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다가 차 안에 가방을 두고 내린 것도 모르고 그냥 숙소로 가려고 하질 않나.
호주에서는 카드가 기계에 먹히면 안전하게 기계 안에 보관되고 은행 직원에게 찾아가야만 다시 꺼낼 수 있는 시스템이라 별 일 없으리라 위로했으나 자비에는 다른 사람이 왔을 때 카드가 나오면 어떡하냐며 패닉에 빠져있었죠. 전화도 해봤지만 현재 저희가 있는 ATM에 어디에 있는 건지 영 위치 파악을 못하였고 내일 주변 은행을 찾아가서 문의를 해야 하는 것처럼 일이 복잡해지고 있었습니다. 한데 숙소에 갔더니 다른 친구가 자기도 그랬는데 그거 전원 콘센트 뽑으면 카드가 다시 나온다고 알려주어 천만다행으로 바로 카드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애늙은이같이 조용조용 깐깐하던 자비에가 정신줄을 놓친 순간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다른 프랑스 친구들이랑 하는 게 똑같아서 괜스레 친근하고 귀여운 마음에 속으로 나는 웃음을 참고 열심히 옆에서 도왔습니다. 불어는 콧등 위에서부터 목구멍 아래까지 모든 부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소리를 만들어서 안 그래도 울그락 풀그락 화내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어서 그냥 말하는 것도 서로 싸우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는데, 심지어 이렇게 뭔가 안 풀리는 상황이 오면 정말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기관을 이용해서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며 폭발하는 표현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친구들이 때로는 너무 따지고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 같아도 그래서인지 뒤끝 없이 더 건강한 정신으로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