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10. 흔치 않던 밤
그리고 그날 밤, 숙소 풀장 옆에서 일부는 밤늦도록 빈땅을 마시며 슬슬 흥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일정대로라면 다음 날 샘과 브람이 누사 렘봉안으로 떠날 예정이었기에 사실상 모두 다 같이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 밤이라는 분위기도 한몫했습니다. 11시가 되자 숙소 안에 있는 바가 문을 닫아서 건물 옥상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노래를 틀어 흥이 더 오르자 샘이 왈츠를 쳐 볼 심산인지 (쓰다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납니다. 영국인은 술 먹으면 왈츠를 추는 건가) 갑자기 제 손을 끌고 리드로 추정되는 몸 짓을 하길래 저라는 각목이 쭈뼛쭈뼛 따라갔습니다. 영화에서 춤을 못 춘다고 허둥대던 사람도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사람의 리드만 따르면 그럴듯하게 춤을 추던 건 역시 판타지였습니다. 저희의 어설픈 몸짓을 보다 못한 엘과 자비에가 춤은 이렇게 추는 거라며 현란한 몸놀림을 보여주더군요. 브람은 어느 쪽이든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으며 웃었습니다. 굿바이 파티를 할 겸 자리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조금 걸어 나가면 큰 바가 있다고 해서 그곳을 향했습니다.
바는 외국인들도 많았지만, 현지인들도 꽤 있었습니다. 저희는 술을 마시다가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저질체력을 호소하며 구석에 앉아서 푹푹 찌는 더위에 맥주를 마시다가도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튀어나와 친구들과 방방 뛰며 즐거운 시간이 한참 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은 순식간에 벌어졌습니다. 저 뒤편에서 엘이 브람과 잠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단호한 표정으로 뒤에 있는 현지인 남자에게 가 뺨을 때리는 듯한 모션의 손짓을 했고, 손끝이 턱 쪽을 스치듯 지나가는 게 슬로 모션으로 보였습니다. 그러고 나자 엘의 손끝에 맞은 남자가 발을 들어 그녀의 복부를 있는 힘을 다해 걷어찼습니다. 엘의 작은 몸은 뒤편으로 날아갔습니다. 보면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러고 나서도 분이 안 풀린 듯 남자는 연신 그녀의 배를 향해 발길질을 하려 했고, 그걸 주변 사람 몇이 붙잡아 막았으며 저희 무리의 남자들이 엘의 앞으로 달려가 막아섰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시간이 뒤틀린 것 같았습니다.
요는, 엘의 뒤에 있던 그 남자가 원피스 아래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움켜잡았다고 했습니다. 놀란 엘은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쳐다봤고 자리를 옮기려는 것을 보고 이런 행동이 그냥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해 그 남자의 뺨을 때렸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지인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폭력이 정당화돼서도 안되지만, 정말 대미지는 1도 안 들어 간 경고의 의미의 타격이었습니다. 엘은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죽일 듯 발길질을 하는 남자의 반응에 충격을 받아 떨고 있었고 이후로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큐리티들이 와서 저 남자가 확실하냐고 네가 괜히 생사람 잡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계속하더군요. 주변 목격자가 함께 진술을 해줘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엘에게 어떻게 확신하냐고 못 믿겠단 눈으로 몰아세울 뿐이었습니다. 그 남자에겐 질문 하나 없이 내보낸 후였습니다. 그 남자는 여전히 문밖에 서서 위협적으로 달려들 틈만 찾고 있었고요.
그제야 여권이 전혀 서있지 않은 나라에 와있다는 사실에 뒤통수를 뻐억 맞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곳의 매니저가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니 기다렸다가,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갈 것을 권장해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상 그곳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이 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으로 인권이 지켜지는 선진국에서 온 친구들이었기에 몇몇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분개를 하고 있었고, 일부는 엘의 입장에서 함께 고통을 느끼고, 또 저처럼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진다는데 충격을 받아할 말을 잃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한참을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 게이 친구는 자신은 게이바를 가도 그렇게 부당하게 위축되는 경험을 해본 적도 걱정을 해본 적조차 없는데, 왜 엘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지 너무 불공평하다며 분노했습니다. 처음부터 막아주지 못한 친구들도 자책감에 힘들어했습니다. 모두에게 다른 의미로 충격적인 밤이었죠.
엘의 용기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무섭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없던 일처럼 지나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걸 압니다. 엘은 반복해서 독일에서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라온 환경에서 쌓인 사회정의에 대한 '믿음'이 바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자양분이 되었겠구나 생각했어요. 자신은 그 사람에게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란 걸 꼭 알려줘야 했고,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간 것은 자신이 잘못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무자비한 폭력으로 응징할 사고를 할 수가 있는지 믿을 수가 없다고 했죠. 아무래도 엘이 가장 놀란 것은 그 사람이 충분히 자신을 지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훨씬 작고 약한 사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찾아 있는힘껏 해코지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어왔던 '정의'가 무너지면서 저희를 뒤흔든 충격이 컸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절대로 참지 말고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엘이 만약 그 순간을 두 눈 질끈 감고 넘겼다면 표면적으로는 조용히 넘길 수 있었을진 몰라도 마음속 깊이 훨씬 더 큰 상처가 남았을 겁니다. 마음속 깊은 방에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을 테니까요. 하물며 친구가 나서 주지 않아도 배신감을 느낄 텐데 내가 나를 그런 순간에 배신했을 때 받는 상처와 미움은 내면을 뒤트는 상흔을 남길 겁니다. 나를 지키고, 가해자의 잘못임을 당당하게 토로할 수 있을 때 불덩이 같던 상처가 덧나지 않고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날, 숙소에서 연계해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골똘히 쳐다보다가 평소의 맑은 얼굴로 "오늘은 쿠킹클래스 안 해볼래?"하고 눈을 반짝이는 엘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손에 묻은 흑먼지는 바로 툭툭 털어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