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counter as event II - apparaître
- 선언
사진은 열림으로서의 사건이다.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현존의 흔적이다.
우리는 대상을 기록하지 않는다.
대상을 부수듯 떨어지는 빛의 파열 속에서,
깊은 그림자와 심연의 흔적 속에 깃든
존재의 부름을 듣고 따라갈 뿐이다.
사진은 세계를 붙잡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리는 그 틈,
그 찰나의 파열에서 드러남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때 우리는 ‘보는 자’가 아니라,
‘드러남을 증언하는 자’로 남는다.
- 부연
열림이라는 말은 철저히 수동적인 표현이다.
누군가 문을 열어주듯, 열림은 ‘열음’이 아니다.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내가 문을 밀어젖히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틈을 내어 나를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따라서 “사진을 통해 내가 세계를 읽는다”는 말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읽히지 않기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
이미지는 넘쳐난다.
이제는 만인이 저널리스트가 된 시대,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드론이 하늘에서 윙윙거리고,
CCTV와 블랙박스가 세계를 감시하고 기록한다.
이 세계 안에서 내가 ‘읽히고 부여받는 위치’만 있을 뿐,
누가 누구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열림’이라는 표현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열어주는 주체가 있음을 전제한다.
그 주체는 무엇일까 — 유령일까?
하지만 유령은 실체가 없다.
앞서 말했듯, 어둠이 실재의 부재로부터 생겨난 허상이라면
유령 또한 실재의 부재가 남긴 잔상일 뿐이다.
근대는 자의식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존할 수 있음을 선언하며
근대적 주체가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 결과, 인간은 오히려 고립되고 갇혔다.
자의식으로 충만한 근대의 물리적 세계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충만함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
역사와 주변의 폐허를 통해 우리는 배워왔다.
환영에 대한 난사는 곧 인간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고,
마침내 실재의 그림자마저 파괴했다.
그렇다면 사진은 무엇인가.
사진이 ‘사건’이라면,
그것은 곧 몸이다.
사진은 “여기 있음” 혹은 “한때 있었음”의 증언이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기에,
그것이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가 사건이 되었을까.
사건은 세계를 열어젖힌다.
사진은 그 열림의 자리에 남겨진,
몸의 잔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