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명함의 의미
프리랜서 활동한 후 처음으로 명함이란걸 만들었다. 그 동안은 주로 반고정 형식으로 항상 일을 주는 곳들이 있었기에 홍보를 할 생각도 없이 조용히 일만 해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 가져다주는 일만 하다 보니 내 색깔은 사라져 가고 상대의 취향이나 요구대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얼마 전 제안 공모 프로젝트를 준비하다가 디자이너는 예술가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글쎄요 딱히 예술은 아닌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처음엔 막연히 디자인이 하고 싶었고 이후로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했기 때문에 나에게 디자인의 정의는 없었다. 자습서 답안지를 훔쳐보는 것처럼 디자인은 예술인가 검색을 해봤다. 몇 개 없는 정의 중에 디자인은 예술과 비즈니스를 오가는 영역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지금 와 떠올려보니 처음에 디자인을 예술의 영역으로 알았고, 내가 표현하는 모든 창작물은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수정 요청을 굉장히 싫어했었다. 사회생활 몇 년 차 이후에는 편하게 일하는 게 장땡이라는 마음으로 결제 잘되면 웬만한 요구사항은 다 수용했던 것 같다. 지금은 내 마음에 드는 시안, 대중성이 높은 시안 2-3가지를 러프하게 넘겨주고 상대 결정에 따라 의견 조율을 달리한다.
성장 없이 정체된 분야에 한계를 느낄 즘 시작했던 미술치료도 디자인과 많이 다르지 않다. 고객이나 담당자, 대상자를 상대하고 파악, 적응, 조율하는 과정, 다양한 경험이 자산이 된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대신 미술치료는 일지 작성과 슈퍼비전 등을 통한 자가점검, 자기 치유 등과 같이 생각지도 못한 과업들이 잔뜩이다.
내 안이 채워져있지 않을 때는 자신감도 없었고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게 좋다고 믿었다. 그런데 꾸준히 뭔가를 해나가고 그에 따라 소신이 단단해지면서 불안은 많이 사그라들고 조금씩 나를 알리며 살아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장 먼저 도메인 주소 구입과 명함을 만들게 되었다. 브런치 작가 신청도 그런 의미의 도전이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미술치료사, 온라인 매거진 편집장이라는 문구를 써넣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었던 것들을 시도해보고 안정적 궤도로 올리기 위해 투자한 시간들, 낯간지럽게 적은 편집장이란 문구의 약간의 뻔뻔함이 귀여웠다. 뭐 나 혼자 하는 것이니 편집장, 에디터, 디자이너, 사진작가까지 다 해 먹는 거다.
여전히 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피알하는 것에는 익숙지 않다. 하지만 명함을 받아 들고 기분이 좋은 걸 보니 누군가 만나면 전해주는 연습을 하면서 적응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