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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ha Mar 08. 2021

모로코에 간 따따 소피아 Diary #1

자연의 섭리 vs 인간의 오만, 자연파괴

모로코 쑥 (전통시장)


자연의 섭리 vs 인간의 오만

 
정말 신기하게도 이 머나먼 아프리카 모로코에 오면서 외장하드에 넣어가지고 온 영상은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이었다.


조금 따분할 수 있지만 어려서부터 동물들을 키워오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을 좋아하고,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었던 난

이 영상들이 좀 더 자연적인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보기에 적절할 것이라 생각했더랬다.
그뿐만 아니라 티플렛 집에 인터넷이 설치 되면서 동영상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도 자연스레 본 프로가 ‘차마고도’, ‘EBS 햄버거 커넥션’이었다.
 
놀라운 점은 내가 본 프로그램들이

모두 3년~5년 정도 다른 시기에 다른 제작자에 의해 제작이 되었지만,

모두 같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파괴에 대한 경고‘ 였다.
 
인간의 욕심과 오만으로 시작된 자연 파괴로 북극에선 빙하가 녹아 북극곰들과 바다표범이 굶어 죽고 있으며, 아마존은 불타오르며, 히말라야산맥에서 중국과 티벳을 이어주던 차마고도도 사라지고 있단다.


인간은 마치 영원히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인 듯,

자연의 섭리보다는 과학적 논리와 경제적 원리로 자연의 섭리를 가뿐히 무시해왔다.
아마도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자연을 통제하려 들었고,

자연의 우위에 서려고 가진 노력을 다해온 듯하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혜택을 받고, 좀 더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론 수많은 동물들이 죽거나 멸종했으며, 수많은 식물들이 세상에서 사라져갔다.


단순히 인간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들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무시하며 동물들을 마치 값싼 물건 다루듯이 다뤘다.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생각하고 느낄 수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말이다.
발달하는 '과학'은 오로지 오만에 가득 찬 인간만을 위한 것이었나 보다.
 
그런데 정말 무섭게도. 

언젠가부터 모로코의 전통시장 쑥을 지나갈 때면 

인간의 배를 불리기 위해 모든 생명으로서의 권리를 박탈 당한채 좁은 우리 안에 갖혀 

인간을 위해 살을 찌우며 죽는 날을 기다리는 닭들의 무기력한 눈에서,  

엉덩이에 빨간 낙인을 찍고 귀에는 죽음의 숫자를 달고 더 많은 살을 찌우기 위해 먹는

슬픈 눈을 한 소들에게서 '인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 곳 아프리카 모로코의 시골마을 티플렛(Tiflet)에 거리에 놓인 양들의 머리들과 다리들, 

빨갛게 고리에 걸린 고깃 덩어리들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인간보다 우월한 동물들이 나타난다면 그 우월한 누군가들에 의해 인간의 모든 권리는 박탈 당한채 많은 살을 찌우기 위해 좁은 우리에 들어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동료들로 만들어진 살찌는 사료를 먹고, 엉덩이에는 빨간 낙인을 찍힌 채, 번호표를 달고 그들을 위해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이 되어서야 우린 우리 때문에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에게 사죄의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더 잔인하고 빠른 방법으로 생명들을 죽여 나갈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잔인한 상상이지만, 이것이 현실이기에 많은 다큐멘터리에서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먄약 이것이 현실이되면 우리는 우리가 가뿐히 무시한 자연의 섭리에 철저히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하지만, 그때가 돼서 우리가 아무리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빈다고 한들,

우리가 저지른 자연의 상처와 눈물 앞에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그 용서를 비는 두 손을 내밀 수 있는 염치는 있으려나.
 
과연, 우리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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