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모로코의 쿠리야(Korean)- 10. 익숙함의 함정
사람만큼 빨리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 또 있을까. 늘 설레고 신기하고, 흥미로웠던 모로코의 일상은 어느덧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매일 아침 밥 먹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조금 쉬다가 잠이 들고, 다시 밥 먹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잠드는 생활의 반복에 내가 모로코에 온 이유와 다짐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떨리는 가슴으로 시작된 봉사에 대한 꿈과 열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 생활의 익숙함과 나태함에 빠져 들었다. 익숙함의 함정이 찾아온 것이다. 아마 해외봉사활동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봉사활동 중에 이러한 익숙함의 함정에 너무나 쉽게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늘 즐겁고, 유쾌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리라 다짐했지만 익숙함은 모든 것을 무감각하게 만들기에, 봉사단원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자신만의 장벽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어느 순간, 낯선 이국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나태함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길 위의 모로코 사람들과의 만남에도 즐거워하고, 거리의 노인들, 홈리스 가족, 구걸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가슴아파하며 어떻게 하면 2년 동안 내가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곤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들과 만남 속에서 나는 이들의 모습들에 익숙해졌다. 아무도 모르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몸과 마음에 익숙함의 함정이 찾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익숙함이란 현지에 잘 적응을 했다는 좋은 의미일 수도 있지만, 나태함과 함께 가슴속의 열정을 잃게 만드는 독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익숙함의 함정을 스스로 인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원봉사자의 책임이기도 하기에 이러한 나태함을 지적해주는 사람 또한 자기 자신뿐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익숙함의 함정은 깊고 깊은 골짜기와도 같았다.
나 역시 모로코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나태함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때 주말이면 가끔 영화를 다운받아 보곤 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연히 보게 된 영화와 책들은 나의 익숙함의 함정을 깨닫게 해주곤 했다. 특히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라는 영화는 나태한 나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거액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서 인도 빈민가의 아이가 퀴즈 왕이 되는 과정을 아이의 빈민가 생활과 연결시켜 풀어낸 영화이다. 나는 이 영화 속 인도 빈민가의 아이들을 보면서 방글라데시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또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정작 이곳 모로코에서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익숙해져 있는 내 자신도 발견했다.
불과 몇 년 전 방글라데시에서 느꼈던 나의 가슴 속 떨림과 방글라데시의 수많은 아이들이 구걸하는 모습을 보며 슬퍼하던 나의 기억은 익숙함이라는 변명 속에 희미해진 추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그라지는 열정만큼 모로코에서의 나의 모습은 그저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편한 일을 찾을 뿐이었다.
이렇게 반복되는 삶에 익숙해진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었다. 익숙함은 감각과 의식마저 희미하게 만들고 있었기에. 영화를 통해 방글라데시와 너무 닮은 인도의 모습을 보면서, 그 당시 품었던 마음을 안고, 세상의 어두운 면을 조금이나마 밝게 변화시키고자 달려가던 내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나태한 나의 모습과는 분명 달랐던 모습을...
영화 이외에도 종종 책을 읽으며 나태해진 나 자신에게 자극을 주기도 했었다. 비록 2년 동안 계획한 만큼의 많은 책을 읽진 못했지만 지구 온난화의 문제점을 과학적 사실과 함께 조목조목 밝힌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과 같은 몇몇 책은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불편한 진실’에서 앨 고어는 미지근한 물속에 끓고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개구리처럼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며 지구 온난화의 문제들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되돌리기 어려운 시점에서 지구의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애석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미지근한 물에 빠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개구리가 바로 내 모습이 아닌가 생각되자 씁쓸하면서도 한 편으론 뜨끔했다.
내가 모로코에 왜 와 있는지, 무엇을 추구하여 이 길을 선택했는지, 어떤 모습에 가슴 아파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내 안일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익숙함이 나의 의식을 멈추게 한 것 같았다. 스스로 자극을 주고, 항상 초심을 잃지 말고 깨어 있어야 했는데 난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2년간의 봉사생활을 후회스럽게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서 빨리 익숙함이라는 함정에서 스스로 나와야 했다.
익숙함의 함정에 빠졌을 때, ‘새해 연초’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획과 다짐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누구나 새해가 되면 초심으로 돌아가 1년간의 계획들을 세우며, 마음을 다지기 때문이다. 새해가 돌아올 때면 사람의 심리를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이렇게 나는 2년 동안 두 번 맞이한 모로코의 새해를 통해 나태해져 가는 마음을 다잡으며 익숙함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곤 했다.
2011년 새해 아침. 나는 난생처음 혼자서 새해를 맞이했다. 지금까지는 너무나 당연하게 사랑하는 가족들 혹은 친구들과 새해를 함께 보냈지만, 모로코에서는 혼자였다. 모로코에서 혼자 맞는 새해는 왠지 모르게 더욱 마음 한구석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던 순간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그러고 보면 난 왜 가족들이 늘 옆에 있던 한국에서는 그 고마움과 소중함을 잘 몰랐었을까? 늘 감사함과 행복은 곁에 있을 때는 깨닫지 못하고, 지나고 나서야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가 보다. 모로코에서 혼자 새해를 맞으며 그 소중함을 깨닫듯이 말이다.
토요일이자 새해의 첫날이었던 이날에도 나는 늦잠을 자려고 침대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2011년의 새해 첫 아침이 아니던가. 전날 새벽 늦게 잠이 들어 졸리고 피곤하긴 했지만 뭔가 새롭게 새해 아침을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밝아오는 창 쪽으로 몸을 일으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 7시였지만 겨울 해는 이제 막 서서히 오르며 새해 아침을 알리는 빛을 품으려는 참이었다. 길거리도 아직 조용했다. 차갑고 촉촉한 새벽공기는 한국에서 밤새 추위에 떨며 기다리다가 동해안 일출을 바라보았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하늘을 보니 날카롭게 잘 말려 올라간 달이 아직 하늘 한 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서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머문 집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새해의 일출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지만, 아직 하늘에 걸린 2010년의 마지막 달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새벽녘 모로코의 거리를 바라보며 새벽 찬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는 것으로 내 몸에도 새해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정말 당장에라도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가 온몸을 돌며 기분 좋은 엔도르핀을 마구 뿜어댔다. 이 기분으로는 2011년 한해를 한 입에라도 삼켜버릴 것만 같았고, 2011년에 겪게 될 어떤 어려움과 슬픔도 모두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말자고 새해에 다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심’에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에너지와 용기가 듬뿍 담겨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난 이 새해의 가열한 기운을 몰아 당장에라도 무엇을 하고 싶었지만, 딱히 무언가 할 일은 없었다. 그저 마음이 그럴 뿐이지. 그래서 조용히 부엌에 가서 어제 먹은 것을 소화도 시킬 겸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타서 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어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너무나 행복한 새해 아침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점점 밝아지는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앞으로의 나의 계획들과 1년간의 온전한 모로코 생활을 그려보았다. 처음 모로코를 출발했을 때 그러했듯이, 감히 내가 상상하지 못할 많은 사건과 사고, 그로인해 느끼게 될 수많은 감정들. 나는 많이 깨지고 부딪히면서 한층 성장해 나갈 것이었다.
‘과연 어떤 경험들이 나를 기다리고,
그 속에서 난 얼마나 웃고, 울고, 감동하고, 반성하게 될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알 수 없는 미지 속에서 앞으로 달려가며, 불안한 미래 속을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나아가고 있는 나의 행복한 모습이 시뮬레이션처럼 스쳐 지나갔다. 불안하면서도 가슴이 떨리며 즐거운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꿈’을 꾸는 느낌이려나.
이렇게 난 1년을 통째로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보내게 되는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한 해를 너무나도 행복하게 맞이했다. 이곳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마음껏 꿈을 꾸겠다고 다짐을 하며,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나태함과 익숙함의 함정에서 멋지게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