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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ha Mar 17. 2018

#12. 40℃의 가슴앓이

제2부 모로코의 쿠리야(Korean) - 09. 40°의 가슴앓이

09. 40℃의 가슴앓이      

  

“지선아, 몸 건강히 2년 동안 잘 살고 돌아와.” 
  “건강이 최고니까 아프지 말고 밥 잘 챙겨먹고 지내.”

한국을 떠나기 전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자 모로코에 와서도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과 통화를 할 때나 모로코의 선배단원들로부터 귀에 박히게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던 나는 모로코 현지식도 잘 먹으며 별 탈 없이 잘 지내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는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나의 건강체질만 믿고 방심하던 때에 그만 눈물, 콧물과 함께 ‘건강이 최고’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일을 겪고야 말았다. 

     

갑자기 찾아온 고열     

  

모로코에 온 지 7개월째인 11월 무렵이었다. 계절이 바뀌어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면서 나는 왠지 모르게 부쩍 피곤해지고 지치면서 기력이 없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지고, 머리에는 열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몸이 아프기 시작하자 순간적으로 ‘지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큰일이다.’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파도 아프다고 호소할 그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으며 아픈 몸이 더욱 콕콕 쑤시듯 힘에 부쳤다. 하지만 현실은 돌봐줄 사람이 없는 혼자였기에 스스로 이겨내야만 했다. 


  ‘스스로 이겨내야지.’ 

마음먹고는 힘겹게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 밥을 지었다. 아플수록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생각에 입맛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밥통에 밥을 하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밥을 하는 중에도 나는 쓰러져 잠이 들었고, 된장찌개를 끓이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자고 깨고를 반복하며 밥을 짓고는 한 숟갈씩 힘겹게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입맛이 없어도 오랜만에 해먹는 밥이라 몸도 맛있었는지 금세 한 그릇을 비워냈다. 


하지만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리기도 전에 또다시 걱정이 앞섰다. 이제 곧 출근을 해야 하는데, 몸이 너무 무겁고 어지러워 60명의 아이들을 가르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습관은 무서운 법이었다. 그저 습관처럼 점심을 먹고 같은 시간 출근 준비를 하고 기관으로 출근했다. 다행히 이날 기관에는 행사가 있어 아이들은 수업 대신 행사참관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강당에 앉아 행사를 지켜보는 가운데도 머리와 온몸이 쿡쿡 쑤셔 앉아 있기조차 힘에 겨웠다. 정말 타지에서는 몸 건강한 것이 제일이라는 선배 단원들의 말이 온몸에 느껴지는 날이 아닐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는 또다시 털썩 쓰러졌다. 머릿속에서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운동도 하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해야 하는데’라며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난 침대에 쓰러진 채로 또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깬 내 몸은 여전히 천근만근이었다. 약을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 하기에 또 다시 무거운 몸을 일으켜 계란과 감자를 한 알씩 삶아 먹었다. 이럴 때 옆에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서글펐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 대충 계란과 감자를 먹고는 감기약을 먹고 다시 드러누웠다. 다행히 코이카(KOICA)에서 준 전기장판이 있어 침대 속은 따뜻했다. 하지만 그래도 으슬으슬 떨려 잠바와 양말로 감싸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스르륵 잠이 들고 나니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아픔보다 더 큰 혼자라는 외로움과 슬픔     

  

감기약을 먹고 하루 이틀이면 나을 줄 알았던 독감은 4일째가 되었지만 좀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다. 여전히 온몸엔 힘이 없고, 안압이 높아져 눈이 앞으로 빠질 것 같았으며, 얼굴은 열이 펄펄 나 입술이 터지고 또 터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낫기는커녕 점점 더 고열과 근육통, 안압이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 말해야 하지? 그저 멍하니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잠바와 양말, 목도리를 두른 채 소파에서 침낭을 덮고 누워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서럽고 답답하고 속상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 속에서 엄마 얼굴이 아른 거렸지만 모로코와 9시간 시차가 나는 한국은 새벽 3시였다. 게다가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대성통곡을 할 것만 같았고, 타국에서 딸이 아프다고 하면 몇 배나 걱정을 할 가족들을 생각하니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난 눈물을 닦으며 3시간이고, 4시간이고를 눈만 껌뻑이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창문 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빨갛게 노을 지던 하늘은 벌써 방안에 어둠을 내렸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이질 않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약이라도 먹고 한숨 자면 나을 텐데.’라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내 몸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난 힘을 내어 촉촉한 눈가를 손으로 쓰윽 닦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움직여 부엌으로 갔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는 다음날까지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것 같아 요거트 하나와 1L 물과 컵, 휴지를 주섬주섬 챙겨 다시 침대로 갔다. 벌써 5번이나 먹었지만 효과가 없던 감기약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게 침대에 전기장판을 켜고 다시 누웠다. 


몸이 아프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점점 나를 약하게 만드는 나쁜 생각들과 함께 온몸을 때리는 듯 한 근육통과 두통, 높아진 안압은 나를 또다시 괴롭혀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아픈 것보다 정말 10배는 더 서럽고 아팠다.      


티플렛의 노을 지는 풍경


그렇게 뒤척이며 몇 시간을 잤을까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약의 효과가 있었는지, 잠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완벽하게 건강해지진 않았지만 그 전날 잠도 못 자고 혼자 끙끙 앓으며 새벽녘 잠을 설친 걸 생각하면 이 정도 나은 것에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기운을 회복해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그런데 기운을 차리고 난 후 나의 증상을 알아보니, 독감이 아니라 뎅기열 증세에 더 가까웠었단다. 바보같이 나는 그것도 모르고 독감이라며 그저 감기약만 먹고 있었던 것이다. 휴. 어쨌든 이번 일로 건강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또 건강해야만 봉사활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아프고 속상한 경험이었지만 모로코에서의 남은 기간들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준 좋은 교훈이 되었다.     


티플렛(Tiflet)집 옥상에서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사실 외국, 그것도 개발도상국에서 2년을 생활하는 것은 절대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분명 혼자 아프기도 하고, 지독히 외로워도 보고, 현지인과의 관계에서 울고 웃기를 수천만 번을 반복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2년의 시간이 지나 한국에 돌아가면 죽도록 외로웠던 일도, 40℃의 고열에 감기약을 먹으며 미련하게 버텼던 것도, 현지인과의 수많은 어려움들도 모두 그곳을 회상하는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과 아픔 속에서 분명한 배움과 성장을 느끼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렇듯 2년간의 봉사생활에는 수많은 사건 사고와 힘들고 슬픈 일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보람되고 행복했던 일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의 KOICA 봉사단원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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