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모로코의 쿠리야(Korean) - 08. 여기는 오지랖 세상
아프리카인 모로코에서는 동양인을 보기가 흔치 않다. 거리상으로도 비행기를 타고 한나절이 훌쩍 넘는 거리니, 어디 동양인 보기가 싶겠는가. 게다가 내가 사는 시골 마을 티플렛(Tiflet)에서는 더더욱 외국인을 보기 힘든 곳이라 외국인 특히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놀림도 심했다.
또 옆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아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보니 한국에서 온 여자아이가 어디 사는지, 어디를 갔었는지, 시장에서 무엇을 샀는지 쯤은 옆 사람에게 물어보면 다 알 정도였다. 이정도로 모로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함께 긍정적인 면에서 오지랖이 넓었다.
이런 이웃들의 오지랖 넓은 관심 덕분에 티플렛(Tiflet)에서 난 꽤 유명해졌다. 물론 지나친 관심에 힘든 적도 있었지만 나 역시 모로코 사람들만큼 오지랖이 넓었던 지라 티플렛(Tiflet) 주민들과 함께 2년 동안 웃지 못 할 오지랖 에피소드들을 많이 만들며 지냈다.
한번은 내가 일하는 기관의 동료 선생님인 메리엄(Marym)에게 우리 집에 초대한다고 해놓고서는 집 주소를 알려주지 못하고 방학이 된 적이 있었다. 서로 전화번호도 모르는 상태라 개학을 하고 나서야 겨우 만날 수 있을 줄 알고 아쉬워하고 있는데, 며칠 후 ‘딩동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우리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하며 ‘쉬쿤(누구세요?)’ 하고 묻자 대답은 ‘아나 메리엄(나 메리엄이야).’이였다. 맙소사 메리엄(Marym)이란다. 너무 놀란 나는 서둘러 그녀를 집으로 맞으며 어떻게 우리 집을 찾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엄마가 시장에서 내가 장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며, 자신의 막내 동생이 내가 이 집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난 그녀의 엄마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녀의 동생은 지나가면서 쓱 한번 봤을 뿐인데, 그녀의 가족은 내 생활을 다 꿰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또 한 번은 메리엄(Marym)이라는 소리에 씻지도 않은 모습에 잠옷 바람으로 문을 활짝 열었더니, 메리엄(Marym)과 함께 처음 본 모로코 소녀 열댓 명이 내가 마치 신기한 원숭이라도 되는 듯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당황한 나를 보면서 메리엄(Marym)은 이들이 명절을 맞아 자신의 집에 놀러온 친척동생들이라고 소개하였다. 또 그들에게는 내가 데리자를 하는 신기한 한국인이며, 자신과 함께 일하게 될 선생님이라며 소개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쑥스러웠지만, 최대한 반갑게 아이들 모두와 정신없이 비즈(Bise: 모로코식 볼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나눈 후에도 아이들은 내가 어떤 말을 할지 잔뜩 기대한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작스런 상황에 그들의 기대에 찬 눈빛까지 뒤섞여 내 머릿속은 까맣게 타서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이거 원 자다가 일어난 모양새로 멋있게 말해야만 할 부담어린 시선까지. 데리자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결국, 당황한 나는 버벅대면서 자기소개와 간단한 인사말만을 겨우 내뱉어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 작게나마 답을 해주었다.
물론 이후에도 내가 잠잘 때든 밥을 먹을 때든 내 집 초인종은 여지없이 울리곤 했다. ‘딩동딩동’ 동네의 친한 아주머니들과 친구들이 단지 얼굴을 보기 위해서, 나에게 안부 인사를 하기 위해서, 꾸스꾸스 먹으러 오라고 초대하기위해서 시도 때도 없이 초인종을 눌러대니 한동안은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정이 담긴 ‘딩동’이기에 초인종 소리가 행복했던 적이 더 많았다.
기관 동료였던 메리엄(Marym) 이외에도 나는 우리 집 근처의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우리 집 아래의 가구가게 아저씨, 집 앞 채소가게 아저씨, 경찰 아저씨, 슈퍼 총각, 홈스테이 아주머니와 친구들과 항상 가깝게 지냈다. 종종 동네에서 이들을 만날 때면 음료수와 빵을 건네며 짧은 데리자로 “잘 지내세요? 더운데 일은 잘되시고요? 너무 덥지는 않으세요?” 등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가 먹는 빵과 음료수의 양보다 그들에게 안부 인사로 주는 게 더 많아져 버렸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지랖 넓은 내 성격이니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오지랖 덕분에 몸은 조금 피곤하고 선물비가 조금 더 들었지만, 내가 힘들 때나 예상치 못한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이들은 몇 배의 위로와 함께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도와주곤 했다. 특히 수도가 터지거나 집 열쇠가 고장 났을 때,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할 때는 어김없이 자신의 일도 멈추고는 달려와 나를 도와주었다.
뿐만 아니라 홈스테이 아주머니는 집을 구하기 위해 이웃들에게 물어가며 나와 함께 발품도 팔아주셨고, 부탄가스를 집에 옮겨야 할 때도 어디서든 친절한 이웃들이 나타나 자기 일처럼 나를 도와주곤 했다. 이들의 조건 없는 오지랖은 나를 늘 감동시켰고, 2년간의 외로운 타지생활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아마도 이런 이웃들의 아낌없는 도움 덕분에 나의 오지랖 넓은 성격이 더 활성화 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티플렛(Tiflet) 이웃주민들의 오지랖뿐만 아니라 나의 오지랖도 점점 퍼져나갔다. 처음 한 달 두 달 티플렛(Tiflet)에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다 보니 기관에 출근하면서 만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눈 마주치고 인사할 일들이 많아졌다. 길가의 옷가게 아저씨, 빵집 아주머니들, 채소가게 아저씨, 세차장 총각들, 슈퍼 아저씨, 지나가다 만난 학부모들까지 나의 오지랖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까? 처음 이곳 티플렛(Tiflet)에 왔을 때는 동양인인 나를 보고 중고등학생들이 그저 신기해서 ‘신와 신와’라고 부르며 중국인이라고 놀리거나, 심하면 호기심어린 장난기로 나에게 돌을 던지거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등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언제 부터인지 누군가가 “저기, 중국인이다.”라고 말하면, 그 옆에 있던 녀석이 “아니야, 쟤 한국인이야.”라고 맞받아치게 되었고, 이 이야기를 듣던 아주머니가 “쟤 시민의 집에서 근무하는 유치원 선생님이야.”, “내 딸 선생님이야.”, “우리 조카 녀석 선생님이야.”라고 설명해 주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간혹 나를 놀리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쏜살같이 달려와 나대신 응징을 가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점점 퍼져나가던 나와 티플렛(Tiflet) 이웃들의 오지랖은 막강해졌고, 나는 점점 더 티플렛(Tiflet)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한번은 등하굣길에 나를 놀리는 중고등학생의 모습을 보게 된 학부모와 학생들이 화가 나서 선생님들에게 제보한 적이 있었다. 이에 나는 수업시간을 이용해 이 문제에 대해 현지인 선생님과 아이들과 함께 진지하게 의논해 본 적도 있었다. 이야기를 해보니 5~7세의 어린 아이들은 어떤 문제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신들의 선생님을 놀리는 행동들에 나보다 기분이 더 상했었나 보다.
그러면서 동양인을 보며 놀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므로 자신들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아이들의 위로와 약속만으로도 기뻤는데, 어느 날 나는 우리 아이들의 행동에 감동 받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유치원 출근길에 나를 유난히 좋아하던 7세 떼떼라는 녀석을 만나 손을 잡고 기관에 가고 있던 중의 일이다. 중고등학생 몇 명이 나를 보고 ‘신와 신와(중국인을 비하하며 부르는 말)’라며 또 키득거리며 놀리는 게 아닌가. 그러자 7세 떼떼는 덩치 큰 형들에게 덤비지는 못하니 미간에 인상을 찌푸리고 입은 삐쭉거리고는 나대신 그 녀석들을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나대신 화를 내는 떼떼가 어찌나 귀엽던지 “선생님은 괜찮아.”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하지만 분이 안 풀렸는지 기관에 도착할 때까지 내 손을 잡고 씩씩거리던 7살 떼떼. 7살 어린 꼬마였지만 마치 내 보디가드처럼 중고등학생들을 째려보던 떼떼의 사랑스런 오지랖 덕분에 출근길이 너무나 든든했었다.
이렇게 모로코 사람들은 나에게 지나치리만큼 관심과 호의를 베풀어 주곤 했다. 마치 우리나라 옛날의 시골 어른들이 이방인을 챙겨주던 것과 같은 따뜻한 정과 순수한 호의를 느꼈다. 가끔은 그 호의와 관심에 짜증을 내기도 하고 부담스럽고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내 모습마저도 품어주었던 모로코 사람들의 따뜻한 오지랖.
나는 이 오지랖 넓은 세상과 오지랖 넓은 사람들을 영원히 잊지 못 할 것이다.
너무나 고맙고 따뜻한 이들의 모습이 내 가슴을 무한히 감동시켰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