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sha Mar 14. 2018

#10. 100명과 함께한 꾸스꾸스

제2부 모로코의 쿠리야(Korean) - 07. 100명과 함께 꾸스꾸스

07. 100명과 함께한 꾸스꾸스    


티플렛(Tiflet)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이다. 2년간 일하게 될 시민의 집(Dar Al Mouwaten)에서 앞으로의 나의 수업방향에 대해 기관장과 의논하며 지낼 때였다. 2시에 점심을 먹고 기관에 출근을 하려는데 아주머니들이 오후 5시에 아주머니들 친구인 함만(모로코식 대중목욕탕) 아주머니 집에 꼭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나는 알았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들은 혹시나 내가 집을 못 찾을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함만 아주머니집 앞의 이곳저곳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에야 나를 보내주었다. 물론 티플렛(Tiflet)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도 항상 길을 잃을까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가며 기관에 출근을 하던 때이다. 

   

인연과 정으로, 아낙네들의 음식 만들기     


오후 5시 기관장과 일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홈스테이 아주머니들이 오라고 알려준 함만 아주머니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의 옥상에서는 이미 닭 26마리가 꾸스꾸스 소스에 몸을 담근 채 푹푹 삶아지고 있었다. 한국 닭보다 큰 모로코 닭들은 모두 부끄럽게 벌거벗은 채로 줄지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양고기로 보이는 고기들이 한가득 있었다. 딱 봐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난 나는 아주머니에게 “이걸 다 누가 먹어요?”라고 물어보았다. 아주머니들은 웃으시며 걱정하지 말란다. 그래도 난 나에게 다 먹으라고 할까봐 덜컥 겁부터 났다. 늘 내가 먹을 수 있는 양 이상의 음식을 준비해주고 계속 먹으라고 했으니 겁이 날 수밖에.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한 명, 두 명 아니 한 가족, 두 가족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만 아주머니의 가족행사 준비는 오후 2시부터 동네 아낙네, 친구들이 모여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시작했단다. 게다가 그들의 자녀들까지 잔심부름을 맡아 분주한 모습이 그야말로 동네 축제가 따로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혈연, 지연에 관계없이 오래된 인연과 정으로 그들만의 연령에 따른 서열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나름 규칙과 규율도 있는 듯 보였다. 예를 들어 가장 어려운 꾸스꾸스를 요리하는 아주머니가 대장이고, 나이가 어린 순서대로 요리하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북적거림 속에서도 2년 6개월이 된 작은 여자아이는 신이 나서 이리저리 잘도 뛰어다니고 있었다. 네 아이가 내 아이고, 내 아이가 네 아이인 모로코에서 이 작은 여자아이의 엄마는 30명이 족히 넘을 듯 했다.   


꾸스꾸스를 만들고 있는 대장 아주머니 하이야트
함만(목욕탕) 아주머니 집 옥상에서 음식 준비에 한창인 아낙네들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닭들을 준비하는 아낙네
함만 아주머니와 잔심부름을 도맡고 있는 아들 에이욥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다면 이럴까?    


외국인인 나는 아주머니들의 배려로 옥상에 자리한 소파에 앉아 동네 아낙네들이 분주히 요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었다. 동네 아낙네들은 서로 도와가며 음식을 만들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울리고 달래며 어른들 옆에서 그들만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의 분주한 모습을 관찰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푸근한 느낌이 들면서, 엄마와 할머니가 이야기해주던 1960년대 한국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발 넓은 외할머니 덕분에 친척들이 많아 늘 북적이며 한상 가득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나의 어린 시절 또한 눈앞에 그려져 가슴이 따뜻해졌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코흘리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그러고 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도 이웃과 정을 나누며,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점점 바쁘게 생활하며 세상은 각박해져만 갔다. 그렇게 변해가던 80년대에 세상에 태어난 나는 이곳의 시골 풍경과 따뜻하게 얽힌 인간관계가 놀라웠다. 사람을 좋아하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내가 늘 그리워하던 세상이 이곳엔 분명 존재하고 있는 듯해 부럽기까지 했다. 


사실 모로코에서도 수도 라바트(Rabat)나 카사블랑카(Casablanca), 페즈(Fez), 마라케시(Marrakech)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이웃과의 왕래도 적고, 모두 각자 살기에 바빠 점점 이웃 간의 정이 말라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도시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곳 티플렛(Tflet)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 차있었다.      


푸근한 정이 넘치는 풍경과 해맑게 뛰노는 어린아이들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긴 나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 좀 더 발전된 사회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질적으로는 덜 발전되었지만 네 것 내 것의 경계 없이 사람의 정으로 돌아가는 사회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발전되었지만 서로서로가 경쟁관계인 사회. 


과연 세상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어떤 것이 더 발전된 사회일까? 이런 저런 고민에 빠져 머리가 아팠던 나는 물질적으로는 덜 발전되었더라도 사람과의 정이 있는 사회가 진정 ‘발전된 사회’라는 나만의 정의를 내리고는 그 어느 곳에서보다 따뜻한 인정으로 묶인 시골마을 티플렛(Tiflet) 옥상에 있음에 행복함을 만끽했다. 

요리하다 잠시 쉬어 이야기 나누는 아낙네들


남동생을 위한 누나의 사랑, 꾸스꾸스     


모로코에서는 매주 금요일이면 가족들이 모여 꾸스꾸스를 나누어 먹지만 이날의 금요일은 더욱 특별했다. 처음에는 여느 금요일처럼 가족들이 모여서 꾸스꾸스를 먹는 날이려니 했는데, 아주머니들에게 물어보니 이날이 함만 아주머니의 남동생이 죽은 기일이란다. 3년 전에 사고로 죽은 남동생을 기리기 위한 함만 아주머니네 대가족행사 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함만 아주머니네 제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저녁 9시쯤이 되자 가족들의 수는 점점 많아졌다. 갓난아기를 안고 온 여자, 양 손에 아이 둘을 데리고 온 여자. 그리고 이들의 할머니와 몇 명인지 셀 수 없는 손자 손녀까지. 수많은 가족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이날의 제사를 위해 저 먼 곳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그랑 택시(도시 간을 잇는 6인용택시)를 타고 모인 것이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로 옥상에 마련한 소파는 이미 꽉 찼고, 아래층에서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가족들이 아직 덜 모였단다. 정말 밤 10시, 11시가 되어도 사람들은 계속 들어왔다. 마치 티플렛 시장님 딸 결혼식 때처럼.


이들의 문화 중에는 서로 만나면 서로의 볼을 맞대고 ‘쪽쪽’ 입으로 소리를 내며 하는 인사(비즈)가 있다. 덕분에 나는 처음 보는 그들과 얼마나 많이 ‘쪽쪽’ 인사를 했는지 모른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부터, 중년, 장년, 청년, 아이들까지 족히 100명은 더 될 것이다. 새로운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하게 된 볼 인사 ‘비즈’ 덕분에 이날 이후 내 양쪽 볼에는 뾰루지가 잔뜩 생기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TV에서 중국영화로만 얼핏 보던 동양인이 옆에 있으니 신기했는지 아이들은 내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고, 저 멀리 시골 어른들도 나를 쳐다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어찌나 쳐다보던지 얼굴이 뚫어질 정도였다. 그래도 뭐 이런 대접을 어디서나 또 받아보겠나 싶어 아이들과 사진도 찍고, 데리자로 말도 붙여보면서 함께 놀았다.

밤11시까지 계속해서 모여든 사람들로 꽉찬 옥상
아이를 안고 온 할머니와 며느리, 손자의 모습
동양인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 신기해서 모여든 옥상


우리는 한 가족, 나는 너의 친구이자 형제야!     


아이들과 사진 찍으며 얼마쯤 놀았을까. 6시나 7시쯤 먹을 줄 알았던 26마리 닭으로 만든 꾸스꾸스는 자정이 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아래층에서 남자들이 모여 코란(이슬람 성경)을 읽고 죽은 남동생의 영혼을 달랜 후에 말이다. 


꾸스꾸스를 먹은 후에는 아떼이(모로코식 전통차)를 마시며, 100명이 넘는 대가족의 따뜻한 담소가 오갔다. 오후 2시부터 아주머니들의 땀과 정성으로 준비된 엄청난 양의 음식들은 한 시간 반 만에 바닥이 나버렸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100명의 가족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의 안부를 물은 후 새벽 1시 30분이 되자 하나 둘 일어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집이 먼 사람은 함만 아주머니 댁에서 자고,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며 함만 아주머니 남동생 제사는 반짝이는 별빛아래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아주머니들과 함께 떠날 준비를 했다. 그새 정이 들어 서로의 볼에 비즈를 하며 헤어지는 100명의 가족. 이날 100명의 가족과 북적였던 시간은 어릴 적 할머니 집에 모여 사촌들과 뛰어놀던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일까 순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이런 쓸쓸한 마음에 홈스테이 아주머니 나자트(Najat)에게 한국의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이곳이 너의 나라고, 이들이 너의 가족이며, 자기가 나의 자매니 외로워 말라고 하셨다. 후훗. 모로코 식으로 늘 듣는 인사말이었지만 이날은 더욱 푸근하고 정겹고 너무나도 고마운 한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자정이 되어 먹게 된 꾸스꾸스와 닭요리



매거진의 이전글 #09. 별보며 춤추는 모로코 전통 결혼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