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모로코의 쿠리야(Korean) - 11.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우리는 흔히 직장생활에 3, 6, 9개월의 고비가 있다고들 한다. 놀랍게도 이 법칙은 바다건너 모로코에서의 해외봉사활동에도 적용되었다. 먼저 첫 번째 찾아온 3개월 고비는 현지훈련을 하고 임지인 티플렛(Tiflet)에서 생활을 안정시키느라 정신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6개월의 고비는 크고도 강렬하게 다가왔었는데, 심리적 고비와 함께 심지어 심한 고열의 뎅기열 증상으로 몸도 아파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고비였었다.
그리고 9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절대 아니고 싶었지만 모로코의 모든 것이 싫어지는 위험한 고비가 찾아오고 말았다. 사실 나는 모로코에 오기 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은 협력관계이므로 선진국이 우월하여 개발도상국을 도와준다는 상하관계의 인식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내가 도와준다는 입장이 아니라 현지인과 동등한 관계로 협의를 통해,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닌 그들에게 필요한 활동을 하리라 마음도 굳게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절대 상하관계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나의 굳은 다짐도 맥없이 무너져 버렸다.
모로코에 온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나는 기관장과 유치원 원장, 현지인 교사와의 의견 차이로 참 많이도 힘들어 하고 있었다. 다른 봉사단원들보다 현지인과 많이 부딪쳐야 했던 업무였기에 현지인들과 서로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오는 갈등으로 더 많이 힘들어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길거리에 지나가면서 듣는 ‘신와(중국인을 비하하며 부르는 말)’ 소리도 싫어졌고, 시장에 가서 흥정을 하며 사야하는 물건 사기도, 자신들의 요구만 하고 나를 무시하는 현지인 교사들도, 욕심이 지나쳐 나의 모든 활동에 잔소리와 참견을 하는 유치원 원장까지 진력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의 모든 것이 싫어지는 건방지고도 위험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 순간에 나는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보다 문제의 원인을 그들에게 돌리곤 했다. 문화와 환경이 다른 그들을 ‘차이’라고 인정하기보다는 은연중에 그들을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난 당신들을 도우려 왔어.
런데 당신들은 나의 도움을 고마워하기 보다는 더 요구만 하고 있고,
동네 아이들은 심지어 계속 신와라고 놀리기까지 해.
정말 싫다 싫어!’
어느덧 마음속엔 이러한 외침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즈음엔 그렇게 현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고, 마음의 문을 점점 닫아가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마치 나의 이런 상황을 깨우쳐주려는 듯 우연한 크리스마스선물이 내게 찾아왔다. 그 선물은 다름 아닌 40년 전 한국전쟁으로 인해 해외원조를 받던 한국의 모습과 이때 한국을 돕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미국의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이야기였다.
내가 우연히 이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건강검진을 하기 위해 수도인 라바트(Rabat)에 올라갔을 때였다. 유숙소에서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이책 저책을 뒤적이다가 ‘2010년 11월 KOICA 월간지’를 보게 된 것이다. 그저 심심함에 펼쳐든 그 책을 읽던 나는 너무나 공감되면서도 당황스러운 한 페이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페이지에는 40년 전 원조를 받던 한국의 모습과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미국평화봉사단원의 모습, 그리고 40년이 지나 노장이 되어 다시 한국을 찾은 그 당시의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모습들과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40년 만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수원국이 된 한국을 다시 찾은 머리가 하얗게 변한 평화봉사단(Peace corps)단원들.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그들이 40년 전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겪었던 어려움과 지금 내가 모로코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는 순간 가슴이 아파왔다.
지금 내가 그렇게 싫어하며 무시하는 모로코 사람들이 옛날 한국 사람들로 교차되었고, 하얀 피부에 ‘코쟁이’라고 불렸을 미국평화봉사단원의 모습과 ‘신와’라고 불리는 내 모습이 교차되어 떠올랐던 것이다. 도와준다는 우월감에 빠져 모로코 사람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과연 나는 얼마나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는가?’
‘내가 한국인으로 살았다면 그 시대 어떤 평화봉사단원을 좋아했을까?’
이렇게 스스로 자문을 하면서 지난 모로코에서의 모습들을 돌이켜보았다. 부끄러운 나의 모습에 속상하기도 했지만 남은 기간 새롭게 봉사활동에 임해야겠다는 의지와 다짐이 불끈불끈 솟아났다. 그렇게 난 우연히 찾아온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무사히 건강검진을 마치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해 조금씩 바뀌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 거짓말처럼 모로코 생활에서도 현지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음이 좀 더 여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지고 있었다. 잦은 의견충돌을 보이던 현지인 교사에게도 먼저 다가가 웃으며 인사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쌓인 감정들이 내 안의 문제였음을 깨닫게 된 것만 같았다.
“그동안 난 왜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했을까?
왜 난 그들보다 우위에 있는 문화를 가졌다고 생각했을까?”
라는 끝없는 반성의 물음표들과 함께 ‘어린아이 무시하지 마라! 네가 걸어왔던 길이다. 노인 무시하지 마라! 네가 갈 길이다.’라는 문구를 늘 상기시켰다.
이날 이후 정말 거짓말처럼 나의 생각과 태도는 조금씩 바뀌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우연이었지만 나에겐 정말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로코 봉사활동의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