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모로코의 우스떼다(Teacher) - 05. 또 다시 배우다.마음
2년간 60명의 아이들과 호흡하며 수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도와주었던 3명의 현지인 교사들이 있었다. 내가 가르쳐야 하는 5세에서 7세의 모로코 아이들은 데리자(모로코식 아랍어)만 할 수 있을 뿐 불어나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반대로 나는 일상생활의 의사소통만 할 수 있을 정도의 데리자만 가능할 뿐이었다.
하지만 교육영역은 의사소통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현지인 교사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현지인 교사들은 성인이므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데리자든 불어든 눈치껏 빨리 이해했고, 아이들에게 데리자로 설명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데리자는 사전이 없지만 불어는 사전이 있기에 수업에 필요한 단어를 찾아가며 수업 내용을 설명할 수 있었고, 현지인 교사는 그 내용을 다시 데리자로 아이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이렇게 매시간 마다 3반 3명의 선생님과 조금씩 호흡을 맞춰가며, 불가능할 것만 같던 예체능 수업을 시작했다.
3명의 현지인 선생님들과 호흡을 맞춰가면서 그들의 개성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먼저 5세 반을 맡고 있던 87년생의 막내 선생님 메리엄은 굉장히 활발하고 상냥한 말괄량이였다. 예쁘장한 얼굴에 마른 몸매로 시골마을 티플렛(Tiflet)에서 흔히 보기 힘든 미인이었고, 예쁜 만큼 외모를 꾸미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와 얌전한 어머니 사이에서 3녀 중 첫째로 태어난 메리엄 선생님은 아이들을 잘 다루는 대신 고집도 센 편이었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수업을 제시할 때마다 그녀의 고집이 나를 힘들게 하기는 했지만, 지쳐있는 나에게 금세 웃으며 다가와 장난을 걸만큼 상냥한 면도 있는 타고난 말괄량이였다.
특히 메리엄 선생님은 음악수업에서 재능을 맘껏 발휘했는데, 처음 듣는 노래와 피아노 반주도 한 번 듣고 금방 잘 따라해 나를 놀라게 하곤 했었다. 흥도 많고 끼도 많았던 메리엄 선생님은 3명의 선생님 중 가장 먼저 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왔었고, 모로코의 명절이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물론 불평도 하고, 투정도 자주 부리며, 심지어 수업을 빼먹으려고 꾀를 부려 나를 속상하게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유치원 행사 때면 어김없이 아이들과 춤을 추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털털한 성격 덕분에 웃을 일이 더 많았던 말괄량이 첫 번째 파트너다.
활발하고 명랑한 메리엄과 달리 6세반의 30세 레일라 선생님은 매우 신중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3명의 선생님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그녀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지내고 있었단다. 그러던 중 2010년 9월에 주변 지인의 추천을 통해 시민의 집 유치원 선생님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그녀는 아이들을 대하는 방법부터 아랍어와 불어를 가르치는 일까지 혼자 시행착오를 겪으며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2년의 경력이 있던 메리엄 선생님과는 달리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그녀는 늘 나에게 아이들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종종 힘들어 지쳐 있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위로해주었으며, 학기 말에는 손수 만든 편지로 나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의지는 늘 나에게 자극이 되었고, 더 노력해야겠다는 의지가 되어주곤 했었다.
또한 그녀 특유의 진지함과 따뜻함은 아이들을 금세 사로잡았다. 아마도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진심어린 위로가 나는 물론 아이들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너무 진지한 나머지 ‘101마리 달마시안’ 만화영화를 보다가 주인공 남녀가 서로 뽀뽀하는 장면이 나오자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영화를 꺼버리고도 했지만, 그녀는 진지함 속의 따뜻한 배려로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한 나의 두 번째 파트너다.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한 선생님은 메리엄과 함께 티플렛(Tiflet) 시민의 집이 시작되는 2008년부터 근무한 40세 쉐마 선생님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모로코 수도 라바트(Rabat)에서 1년간의 유치원 교사 양성과정을 다녔다는 그녀는 3명의 선생님 중 유일하게 유아교육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로코의 유아교육 방식은 글자 공부뿐이었기 때문에 유아 발달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편이었다. 쉐마 선생님은 굉장히 무뚝뚝하지만 또한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표정 없는 얼굴과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다가가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서로 호흡을 마쳐가면서는 나와 가장 손발이 잘 맞았던 선생님이었다.
또한 레일라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유아교육 방법을 배우고 싶은 의욕이 있어 종종 이런 저런 질문을 하기도 하고, 수업 방식을 잘 관찰하고 있다가 이후 그대로 적용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수업방식을 변화시켜 나가기도 했다. 내가 불어로 간단히 수업 방법을 이야기하면 쉐마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주며 수업을 이끌어 나가 우리는 서로 손발이 잘 맞았다.
나중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쉐마 선생님은 40세인 2011년 2월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미국으로 일을 하러 갔고, 자신은 몸이 아픈 친정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티플렛(Tiflet)에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끔 남편 사진을 보여주며 그리움을 표현했던 쉐마 선생님. 아프신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활을 혼자 꾸려나가야 하는 책임감에 강하게 보여야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뚝뚝함 속에 그녀만의 따뜻한 정과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 더욱 정이 갔던 나의 세 번째 파트너다.
이렇게 개성강한 3명의 선생님과 호흡을 맞춰가며 2년간 수업을 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 만은 않았다. 지금은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지만 처음 수업을 시작했을 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말보다는 눈빛과 태도, 느낌으로 서로를 의식하고 알아가게 된다. 국적과 언어를 넘어선 이곳 모로코에서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렇게 서로의 말과 눈빛, 태도와 느낌들이 전해지며 시간이 흐르자 어느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하는 말과 마음을 나와 함께 한 현지인 교사들이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다. 나 역시 알아듣지 못했던 그들의 말과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게 있던 경계심과 의심을 풀었고, 말랑말랑해진 마음속에 서로의 마음이 닿는 순간 통할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짧은 순간에 나의 현지어 실력이 급격히 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한국말을 하게 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마음을 열자 서로가 하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고, 알아들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말하지 않은 말도 알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혹자는 많은 단어와 동사를 알아야 말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또는 높은 점수가 그의 언어 실력을 대변해 준다고 한다.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사소통이란 겉으로 보이는 수많은 단어와 전문적인 지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태도 속에서 수많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진심으로 서로의 마음을 열고 바라본다면 말하지 않은 말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눈빛과 얼굴의 작은 미소 하나로 서로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엔 언제나 ‘진심’이라는 힘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내면의 소리와 힘은 이렇게 나와 개성 강한 3명의 현지인 교사들을 끈끈하게 이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