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에피소드 10 (또는 프로필 2)
오랜만에 흰 눈이 내렸다. 그것도 제법 많이. 원래 따뜻한 동네이기도 하지만 서해로부터 넘어오는 눈구름이 소백산맥 서편에만 가득 눈을 뿌리고는 그 역할을 다해버려서인지 눈 구경 한 번 못하고 겨울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새벽부터 시작된 눈이 하루 종일 그치질 않았다. 오랜만에 내린 함박눈에 설렐 법도 하건만 하루 종일 가슴이 아프고 슬프고 부끄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켠 노트북 컴퓨터에서 나는 한 죽음을 마주했다. 그 죽음은 나의 20대 대학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도 한 죽음이 있었다. 아니 여러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거리에 있었다. 글을 써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겠다던 꿈을 뒤로한 채, 그 무더웠던 5월의 거리 한복판에서 부끄러울 것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좀 더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다시 그 죽음과 마주했다. 첫 차를 산 기념으로 친구 녀석과 당시 유행이었던 남도 답사를 떠났다가 광주에 들렀다.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카오디오에 민중가요를 힘차게 틀어 놓고는 망월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10년 전과 꼭 같은 얼굴로 누워 있는 그 죽음 앞에서, 나는 부끄러웠다. 글을 쓰지도 못하고, 세상을 바꾸는 길에서도 멀어진 나의 모습에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떠올리고는 쓸쓸히, 친구 녀석과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친구 녀석이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멀어져 가는 하루하루를 부끄러워하며 울었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났다. 나는 또 한 죽음을 마주했다. 그것은 전혀 일면식도 없는, 나보다 어린 작가의 죽음이었다. 그는 20**년 대한민국에서 굶어 죽었다. 마지막까지 삶의 한 자락을 붙잡으며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던 그는 정말 어이없게도 “굶어” 죽었다고 했다. 나는 또 부끄러웠다. 그리고는 대학 시절 열심히 읽었던 브레히트의 시를 생각해 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시의 한 구절도 떠오르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다시 인터넷 검색을 했다. 하지만 다시 노트북을 꺼버리고 책장을 살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 위에는 내 지난 20여 년의 삶의 자락들이 “먼지가 되어” 켜켜이 앉아 있었다. 나는 또 부끄러웠다. 한숨을 내쉬며 브레히트의 시집을 찾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집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처음 문학 동아리에 들어갔을 때 한 여자 선배가 선물로 준 그 시집을 나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의 이사에도 불구하고 분명 다른 시집들과 함께 책장에 꽂아 두었었다. 그런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누군가에게 빌려 주었는가 해서 옛 친구들과 후배들을 떠올려 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릴없이 노트북을 챙겨 집을 나섰다. 주차장엔 머리에 눈을 잔뜩 인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엉금엉금 느린 속도로 차를 몰고 서점에 갔다. 서점에는 그렇게 눈이 많이 왔는데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익숙하게 서점 곳곳에 놓여 있는 검색용 PC를 조작해 브레히트의 시집과 다산 시선을 찾았다. 그런데 브레히트 시집과 다산 시선은 서가의 제일 꼭대기 한 구석에 있었다. 여직원에게 부탁했더니 직원은 간이 사다리를 가지고 왔다. 스커트를 입은 여직원을 사다리에 올리기가 미안해서 내가 직접 올라가겠다고 하니 여직원이 고맙다며 웃었다. 사다리에 올라 두 시집을 꺼내 사다리를 내려오려는데 봄방학을 맞은 여고생들이 참고서를 고르다 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또 부끄러웠다. 황급히 계산을 마치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하고 한 자리를 차지했다. 노트북을 켜고 부팅이 되는 동안 브레히트의 시집을 펼쳤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분명 알고 있던 구절인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또 부끄러웠다.
노트북은 이미 부팅이 끝나 있었다. 나는 그 작가의 이름을 검색했다. 인터넷 기사, 블로그, 소셜미디어 등엔 그의 죽음에 관한 소식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추모의 글들도 이미 많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 기사 중 하나에 댓글로 추모시를 올렸다. 그리고 나의 블로그와 소셜미디어에도 그 시를 올렸다.
론도 2
- 20**년 2월에 내리는 눈
김치 한 보시기와 식은 밥 한 그릇보다 못한
20**년 2월의 대한민국에서
눈이 내린다
젊은 작가는 굶어 죽었다
마음껏 기침도 하지 못한 채
20**년 2월의 대한민국에서
젊은 작가는 굶어 죽었다
마음껏 기침도 하지 못한 채
눈이 내린다
김치 한 보시기와 식은 밥 한 그릇보다 못한
눈이 내린다
김치 한 보시기와 식은 밥 한 그릇보다 못한
젊은 작가는 굶어 죽었다
마음껏 기침도 하지 못한 채
20**년 2월의 대한민국에서
젊은 작가는 굶어 죽었다
마음껏 가래도 뱉지 못한 채
김치 한 보시기와 식은 밥 한 그릇보다 못한
20**년 2월의 대한민국에서
눈이 내린다
그렇게 일련의 작업을 끝낸 순간, 나는 얼마 전 새로 만든 나의 블로그 닉네임을 보고 또 부끄러웠다. “찌질한, 카페 좌파” 그랬다. 나는 찌질하게도 10년이 넘게 부끄러워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젊은이들이 각자 쾌활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수다를 떨고 있는 카페의 한 구석에서 “나는 지난밤 꿈속에서 나의 옛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니 통곡을 하고 말았다. 부끄럽고 찌질하게 말이다.
----
주)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