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에피소드 9
“당신에게 줄 것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아.”
하루 종일 이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곳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카페 올드”. 여기는 지구 연대로 서기 1980년대,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카페다. 사방 50미터까지 확장되는 라이브 윈도 디스플레이에는 역시 지구 연대,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작은 지방 도시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그 시대, 그 시간, 그 장소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디스플레이에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 시대의 차량이 지나가고 멈추고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 출입문을 열고 밖에 나가면 그것들은 나를 그대로 통과해 지나갈 가상현실에 불과하지만 놀랄 만큼 사실적인 홀로그래피는 그 시대의 공기마저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요즘 이런 카페가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하필 은하의 변두리에 있는, 그것도 더 이상 고등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행성으로 변해버린 지구의, 한 작은 나라의, 특별하지도 않은 시대의, 거기서도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올드”라는 간판까지 내건 이 카페는 다른 카페들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보통은 한 달 정도 지나면 바꾸어 버리는 가상 인테리어 시스템과 라이브 윈도 디스플레이의 홀로그래피를 이 카페 “올드”는 거의 몇 년 동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달라지는 것은 음악뿐이었다. 물론, 그 음악도 지구 연대 200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바깥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은, 슬픈 음악이지만 말이다.
카페 주인은 합성 재료로 만든 것이 분명한 원두를 수동 기계를 이용해 분쇄하고 거름종이에 올려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려 팔고 있다. 그런데 주인이 어떤 마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그 맛이 이미 멸종해버린 지구산 커피 맛을 그대로 내고 있었다. 내가 원래 지구산 커피의 맛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하여튼 지구산 커피 맛을 흉내 내는 카페가 근래에 여러 행성에 많이 생겼지만 모두 비슷비슷한 것에 비하면 이곳 카페 “올드”의 커피 맛은 분명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주인이 지구 이주민의 순혈 후손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주인은 그에 대해 별 말이 없었다. 아니 주인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긴 주문과 계산이 모두 브레인 네트워크로 이루어지는 이 세계에서는 무슨 말이라도 필요 없을 것이다.
“기억났어요?”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아니, 아직.”
“뇌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백신으로 스캔해봤는데 별 문제없었어.”
“이상하네. 당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잖아요. 용량이 부족한 건 아니죠?”
“무거운 것들은 클라우드에 저장해 두었으니 그건 아닐 거야.”
“혹시 클라우드에 저장해둔 게 동기화 과정에서 오류가 난 건 아니에요?”
“아냐. 말했잖아. 중요한 건 직접 기억해 둔다고.”
“어쨌든 잘 떠올려 봐요. 내가 더 궁금해지네.”
“언제 올 거야?”
“1시간 후예요.”
“그래, 알았어.”
1시간 후라면 별로 시간이 없다. 무슨 말이냐고? 간단하지 않은가 1시간뿐이라니. 그 시간 안에 나는 뭔가를 떠올려야 한다. 분명 그녀에게 줄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게 뭔지 떠오르면 그것을 찾거나 구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1시간이라면. 글쎄 가능할까? 혹시라도 다른 행성 시스템에 두고 온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분명 그것이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말이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그때였다.
“이거, 한 잔 더 하실래요?”
주인이었다. 카페 “올드”의 주인. 그가 어느새 짙은 갈색 커피가 가득 담긴 잔을 들고 내 옆에 서 있었다.
“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당신 표정만 봐도 알겠더군요. 이거 한 잔 마시고 나면 아마 괜찮아질 겁니다.”
그는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약간 거친, 그런데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본 낯익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주인이 가져다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무척 향기로운 커피였다. 아니, 그것은 지금까지 마셔온 커피와는 전혀 다른 향기와 맛을 가진 커피였다. 지구산 커피 맛을 흉내 내는 다른 카페들뿐만 아니라 이곳 “카페 올드”에서도 처음 맛보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감겼다. 그러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내 몸이 한 조각씩, 아니 거의 분자 상태로 낱낱이 흩어져 주위 공간과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자유와 평화라는 걸 느낄 수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까? 그때였다.
“기억났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 줄 것이 무엇인가를 기억해 내었다.
“응, 기억났어.”
그것은 나, 바로 나 자신이었다.
“좋아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당신은 은하 러브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접속했습니다. 당신이 설정한 연인은 13번째 서버 M섹터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지구 연대 2013년, 카페 올드는 당신이 선택한 미팅 장소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인터페이스는 재설정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완벽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좀 쉽게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의 연인, 서버 13M섹터에 완벽하게 흡수, 저장될 것입니다. 그 후 당신은 영원히 사랑과 평화의 세계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인터페이스 재설정 시간까지 이제 10분이 남았습니다. 다른 질문 있나요?”
“만약 싫증이 나면 어떻게 해?”
“통계적으로 말하면 그럴 가능성은 0.1퍼센트도 되지 않습니다. 저희 은하 러브 시스템은 완벽하니까요. 혹시라도 그럴 가능성을 대비해서 서브시스템에 당신의 현재 인터페이스를 백업해 두겠습니다. 언제라도 싫증이 나면 방금 마신 커피 향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인터페이스대로 복원할 수 있습니다. 백업으로부터의 복원 비율은 러브 시스템 결합 시간과 당신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72.8퍼센트입니다. 나머지는 비정상적인 상태로 남을 것입니다. 너무 낮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50퍼센트 안팎의 다른 업체에 비해서는 대단히 높은 비율입니다. 그리고 원래 사랑이 그렇습니다. 인터페이스 재설정 시간까지 이제 8분이 남았습니다. 또 다른 질문 있나요?”
“없어.”
“좋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은하 러브 시스템의 인터페이스 재설정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과 평화 속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당신이 설정한 배경음악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응.”
그러자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왔다.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 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나는
나는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 인형처럼
소금 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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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류시화 시, 안치환 곡 <소금 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