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이 34에 1,000원 동냥을 하다.

그냥 사람 사는 글이지요

by 적필

덜커덩덜커덩 뽀글뽀글 할머님들과 스타렉스에 몸을 싣고 승가사로 올라간다. 오전에 시간 여유가 있으면 직접 올라가려 했으나 마라톤으로 인해 버스가 우회하는 바람에 늦게 도착했다. 마침 셔틀 시간이 8시부터라 그냥 셔틀을 타고 올라갔다. 참고로 등산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일정이 있는 관계로 편한 길을 택했다.

문제는 스타렉스에 타려면 1,000원을 현금으로 드려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애초에 탈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래서 동냥아치마냥 주변 어르신께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살갑게 질문을 건네주시던 분이 계셔서 양해를 구하고 이체를 드리겠다고 했으나 만류하셨다. 다 그렇게 올라가는 것이라며. 그런 게 세상이고 인간이라며. 아 마지막 문장은 내가 지어낸 말이다. 난 가끔 기억을 왜곡시킨다. 미안하다.

그렇게 스타렉스 안엔 이미 뽀글뽀글 할머님들이 탑승해 계셨고 난 바로 매드맥스 영화 촬영지로 빨려 들어갔다. 분명 이 스타렉스는 개조한 차량일 것이다. 이건 스타렉스가 아닌 오프로드 차량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비탈길 위에서 곡예 운행을 펼치는 기사님의 표정은 고요한 바다와 같이 잠잠했다. 보통 할머님들은 귀신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소리를 지를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 상황에서 당황한 안색은 나뿐인 것 같았다. 애써 괜찮은 척 옆에 손잡이를 슬그머니 잡았다.

각도기 90에 가까운 험준한 산세를 스타렉스로 오르는 경험은 낯설면서 꽤나 짜릿했다. 내 안의 아주 작은 야성미가 이 스타렉스에 투영된 것처럼. 특히 가장 마지막까지 말 한마디 없던 과묵한 기사님께서 "놀라지 마세요"와 동시에 드리프트를 하며 태양의 서커스단 못지않은 예술에 가까운 피날레는 아직도 생생하다.

한데 자본주의에 찌든 기름때와 같은 나는 한 손에 꽉 쥐고 있던 천원이 자꾸만 거슬렸다. '기사님이 돈을 왜 안 걷으시지?', '이 돈을 언제 드려야 하지?', '왜 아무도 돈 이야기를 안 하지?', '돈을 안 걷으시니 가만히 있다가, 입 싹 닦고 다시 그 아저씨에게 돌려 드려야 하나?'와 같은 찌꺼기 같은 질문들이 자꾸 날 방해했다. 여기 타고 계신 분들의 표정은 나이에 맞지 않게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는데 가장 어린 나는 1,000원보다도 저렴한 생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 차라리 내가 먼저 돈 이야기를 꺼내볼까?' 하다가 '아서라, 이렇게 사람 냄새나는 곳에 더러운 오물을 뿌리는 행동은 말자'하고 잘 참았다.

인천 월미도의 디팡 장인이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지 않듯, 묘기를 마친 기사님은 돈을 걷으려는 어떤 표정이나 행동조차 보이지 않고 순진한 웃음으로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도와주셨다. 그러던 중 어떤 아주머니께서 내리면서 기사님께 돈을 드리는 것이었다. '아, 드디어! 이 무거운 1,000원을 보낼 수 있겠구나'하며 잽싸게 그 행렬에 참여했다. 올해 가장 무거운 돈이었다. 이 돈은 나에게 감사함의 의미로서가 아닌 떳떳함의 용도로서 쥐고 있었기에 짐으로 느껴졌나 보다. 다른 이들의 돈은 가벼워 보였다.

짐을 벗어 던지자마자, 돈을 흔쾌히 주신 아저씨께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동시에 사진을 찍어주실 수 있냐고 여쭤봤다. 날강도가 따로 없다. 아저씨는 산에서 일을 한다고 하셨다.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는 직접 말하고 싶어 하시는 눈치가 아니어서 깊게 여쭙진 않았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주고 훌훌히 떠나셨다. 얼떨결에 사진이란 명목으로 번호를 교환했다. 나중에 당신께서 등산하시며 찍은 꽃과 산등성이의 사진들이 와서 하산하며 웃음이 나왔다. 너무 멋있다고 연신 리액션을 했으나 답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나의 고도의 가식이 통하지 않았다. 시원시원하셨던 그의 성격대로.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멋쟁이처럼.

내린 곳은 사천왕상이 있는 곳이었는데 비파를 든 상이 먼저 보였다. 찾아보니 동방의 지국천왕상이었다. 블로그의 이미지로 보다 실제로 보니 더욱 거대했다. 역시 블로그는 믿을게 못 된다. 난 사천왕상의 늠름하고 장엄한 모습도 좋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조각상은 사자다. 난 사자가 좋다. 친구들은 언제나 호랑이를 외쳐댔지만 난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고 생각한다. 호랑이는 얄밉고 간사하게 생긴 반면 사자는 내 기준에 곧다. 그리고 위엄 있다. 그래서 난 사자가 좋다. 그냥 좋다.

사천왕상 사진을 몇 장 찍고 사자를 향한 구애를 열정적으로 펼쳐 보인다. 결국 사자의 사진이 가장 많이 남았다. 사진을 찍고 승가사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리고 바닥으로 내리꽂는 절벽과 같은 곳을 초딩마냥 먼지를 폴폴 풍기며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너무 신을 내버린 나머지 측면을 접질렸다. 초딩 때 닌자를 흉내 내며 사선으로 이리저리 뛰는 꼴을 하다 그리된 것이다. 나이 34에 참 창피한 짓이다. 아는 동생들은 사춘기가 제때 오는 것이 복이라는 말이 요즘 유행이라며 날 돌려까곤 한다. 요즘 들어 심히 인정되는 말이라 난 침잠한다. 저 깊은 심연으로.


오늘도 퍽 즐거운 하루였다.


- 251026(일) 혼자 북한산 승가사를 다녀오며

필름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사진들, 그리고 현상, 인화까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