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붉게 물든 하늘을 스치며 지나가던 날이 있었다.
햇살은 하루의 끝을 조금씩 저물게 하고 있었고 나는 그저 조용히 길 위에 서서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해질녘의 빛과 함께 스며든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오래전 들었던 노래처럼 가슴 깊은 곳을 흔들었다.
사람의 이름에는 묘한 힘이 있다.
어릴 적에는 이름이 그저 나를 구분하는 표지였을 뿐이었는데 세월이 쌓일수록 그 이름은 나의 발자국이 되고
내가 지나온 기억의 무늬가 된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나는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해질녘 들려온 이름은 나를 불러 세우는 손길 같았다.
하루 종일 지친 몸을 이끌고 살아가는 동안 나는 종종 내가 누구인지 잊곤 했다.
일과 책임, 혹은 어깨 위의 무게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작은 기계처럼 움직이며 버텼다.
하지만 이름을 듣는 순간 그 무게들이 잠시 풀어지고 내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이름은 상처가 되기도 한다.
삐걱거리던 관계 속에서 날카롭게 던져진 음성은 밤마다 귓가를 울리며 나를 흔들었다.
어떤 이름은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가 마지막으로 불러주었던 목소리는 지금도 바람결에 섞여 다가와 눈시울을 적신다.
하지만 어떤 이름은 기적이 된다.
한 번의 부름으로 삶을 버티게 하고 한 번의 속삭임으로 희망을 다시 붙잡게 한다.
나는 해질녘 그 순간에 기적을 들었다.
세상은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고 사람은 수많은 길 위에서 서로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또 누군가에게 불려지는 일은 그 모든 스침 속에서도 특별한 순간으로 남는다. 해가 저물 때마다 나는 이름을 불러본다.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마음에 얹는다.
그 이름들은 별빛처럼 저녁 하늘에 흩뿌려지고 나는 그 속에서 나의 하루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름은 단순한 글자의 모음이 아니다.
그 속에는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지켜낸 꿈과 겪어낸 슬픔과 나누었던 사랑이 다 들어 있다
그래서 해질녘에 이름을 부르면 그 순간은 하루의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노을빛이 하늘에 울려 퍼지고 그 위에 이름 하나가 얹히면 그것은 노래가 되어 가슴속에 번져 간다.
나는 오늘도 들려온 이름을 가슴에 담았다.
그 목소리는 바람처럼 스쳐갔지만 내 안에서는 오래도록 메아리처럼 울렸다.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내 이름을 잊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누군가의 이름을 놓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진심을 다해 불러본 이름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의 삶 속에 작은 등불처럼 남아 있음을 믿는다.
해질녘 들려온 이름은 나를 다시 걷게 했다.
붉게 저무는 길 위에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를 불러주는 목소리가 있다는 건 이 세상 어디선가 나를 기다려주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 하나로도 나는 오늘 하루를 견디고 내일을 맞이할 용기를 얻는다.
사람은 모두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그 이름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오늘 해질녘에 내 이름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름은 단순히 불리는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기도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전하는 시이며 누군가에게는 존재를 확인하는 빛이라는 것을.
해가 다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마음속으로 이름을 불러본다.
멀리 있는 이의 이름
이미 떠나간 이의 이름
아직 만나지 못한 이의 이름까지 그 모든 이름을 하늘에 띄운다.
그러면 세상이 고요해지고 바람이 잠시 멈추는 것 같았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안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은 결국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데서 온다는 것을 오늘 해질녘 내게 들려온 이름 하나가
내일의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그 목소리는 잔잔한 노래처럼 남아 긴 세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마음 깊은 곳에 새기며 다시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