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지나가는 길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남는다.
누구도 볼 수 없지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 나는 늘 바람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 좁은 골목길을 돌면 맞닥뜨리던 바람의 향기는 낯설지 않은 위로였다. 바람은 다정했다. 지나가면서 모든 것을 툭툭 어루만졌고, 소리 없이 등을 밀어주었다. 나는 그 바람을 쫓아 동네를 누비며 자랐다.
나이가 들면서 바람의 얼굴은 조금씩 달라졌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차가웠고, 때로는 무심했다. 그러나 그 모든 얼굴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늘 나와 함께였다. 슬픔이 깊던 어느 겨울날, 나는 바람 앞에서 조용히 울었다. 그날 바람은 싸늘했지만, 이상하게도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이 내 울음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삶은 바람과 닮았다.
붙잡을 수 없고, 흘러가는 것. 하지만 그 속에는 숨겨진 따뜻함이 있다. 나는 어릴 적 살던 작은 집을 자주 떠올린다. 그 집은 늘 바람이 머무는 곳이었다. 봄이면 꽃잎을 데려오고, 여름이면 뜨거운 햇살을 들이고, 가을이면 낙엽을 흩뿌리고, 겨울이면 차가운 별빛을 안고 왔다. 창문을 열면 언제나 바람이 들었다.
그 바람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웃음, 아버지의 낮은 콧노래, 어머니의 밥 짓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모든 소리가 그 바람 속에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바람을 통해 집을 느꼈고, 사랑을 배웠고, 시간의 흐름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 집을 떠났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고, 더 많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나는 자꾸만 바람을 찾았다. 그 바람이 머물던 집을 그리워했다. 바쁜 도시 한복판에서도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바람을 맞았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기억의 소리를 들었다.
요즘은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면서 바람을 느끼는 시간을 좋아한다. 하루 한 시간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그 시간이 나에게 포근함과 행복감을 실어다 준다.
바람은 지나간 기억을 데려오고, 잊힌 마음을 불러낸다. 내가 지쳐 있을 때마다 바람은 속삭인다.
"괜찮아, 여기서 잠시 쉬어도 돼."
어디선가 낮고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이제 바람이 머무는 집을 마음속에 짓는다.
어릴 적 그 집처럼, 늘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마음의 창을 열어 둔다. 기쁨의 바람도, 슬픔의 바람도 모두 지나가게 둔다. 바람은 지나가지만, 향기는 남고, 온기는 스며들고, 기억은 자란다.
언젠가 아주 늙어 바람보다 느린 걸음으로 살아가게 될 때,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할 것이다.
"나는 평생 바람을 따라 걸었고, 바람 속에서 살아왔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속삭일꺼야.
바람이 머무는 집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 집은 늘 내 마음 안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