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약속한 것.

by 리도씨

새벽이 오면,

베란다를 열고 나는 가장 먼저 1층 공원에 있는 나무를 쳐다본다.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는 그 나무는 말없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꽃이 피고, 잎이 자라고, 바람에 흔들리고, 때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지뿐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은 그 나무에겐 다 필요한 것이었다. 잎이 없을 때도, 꽃이 지고 나서도, 나무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좋다.

무엇 하나 설명하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것. 변화 앞에서도 초조하지 않고, 누군가를 따라 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리듬대로 살아가는 그 단단한 고요함이 부럽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자주 흔들린다. 누군가와 비교하며 조급해지고, 왜 나만 이 자리에 머무는지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 그 끝없는 바람 속에서 나는 자주 지쳐갔다.

하지만 나무는 말한다. "조금씩 자라는 것도 충분히 아름답다." 고


나는 어린 시절 뒷산 언저리에 있던 오래된 나무를 기억한다.

그 나무 아래서 형과 함께 여름의 한낮을 피했다. 나무 그늘은 커다랗고 시원했으며, 그 안에선 어떤 고민도 바람결에 날아가는 듯했다. 그 나무는 아주 오래된 존재였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묵묵히 그늘이 되어주었다.


사람도 나무 같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말없이 곁에 있어주고, 계절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존재.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보다 기다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사람.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내게 많은 것을 해준 사람이 아니라, 가장 조용히 곁에 있어준 사람이었다. 말없이 기다려준 친구,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준 사람, 실수했을 때 손을 놓지 않았던 사람. 그들은 나무 같았다. 흔들리는 내 마음에 조용히 뿌리를 내려주었다.


요즘 나는 나무를 닮기 위해 노력한다. 말수를 줄이고, 더 많이 듣고, 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조급함에 흔들리지 않으려 한다. 어떤 날은 잘 안 되지만, 그래도 다시 나무를 본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남긴 약속을 기억한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언제 꽃이 필까? 언제 열매를 맺을까? 하지만 나무는 그 물음에 서두르지 않는다. 햇살과 비, 바람과 시간, 그 모든 것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을 피운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눈부신 순간은 결국 찾아온다. 하지만 그것은 기다림과 인내, 그리고 매일을 견뎌낸 시간의 결과다.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피어나는가다.

삶이 버거울 때마다 나는 나무 아래서 쉬어간다. 나무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안다. 그 침묵 속에 담긴 응원이 있다는 것을. 나무는 매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괜찮아. 조금 늦어도 돼.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바쁘게 달려가는 이들의 길가에서, 잠시 기대어 숨을 고를 수 있는 나무 같은 사람.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내 안의 계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툰 날도 다정히 안아주는 사람. 내가 나에게, 가장 따뜻한 그늘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삶에서 내가 지키고 싶은 약속이다.


오늘도 창밖의 나무는 말없이 서 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조용히. 그리고 그 고요한 자리에, 나도 조용히 나를 세워본다.


그 순간, 나는 안다.

지금도 나는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아주 조용한 날에 나도 꽃을 피우리라는 것을.

나무는 약속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살아냈을 뿐이다.


그 살아냄 자체가, 가장 깊은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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