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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24. 2020

반성일기1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데이비드 케슬러의 <인생수업>(이레, 2015)

이것은 반성일기다. 


오늘을 산다고 생각하고 다짐하고 노력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의 나는 그러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타인의 이야기에 경청해야 함을 느끼면서도 타인과의 대화에서 나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말로 가득차 있다. 상대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마라톤 선수의 출발자세 같다. 


오늘을 살고 현재의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지는 정작 몰랐던 것이란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마치 수학 공식만 달달 외우고 응용문제는 풀지 못하는 것, 또는 알파벳은 달달 외우지만 정작 알파벳으로 쓰인 문장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제의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크나큰 자유가 있습니다. 그때 더 이상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살지 않으면, 행복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문을 닫지 말고 가끔씩 그 문을 들여다보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p141)"


내가 어제의 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도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삶은 확연히 달라진다. 당신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내 안의 정의로 상대를 바라보면 나는 더 이상 상대의 현재를 볼 수 없게 된다. 사과의 모습을 내 머리가 정하고 나면 눈 앞의 사과는 볼 수 없게 된다. 머리가 그린 사과만이 존재한다. 그 머릿속 사과는 눈 앞에 있는 사과가 아니다. 


어제는 아버지에게 또 한 번 화를 내고 말았다. 제발 눈 앞에 있는 자식들을 바라봐 달라고 울며 부탁했다. 나도 그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매번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며, 그 말을 떠올렸다. 자식들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숨막힌다. 나도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그냥 아버지가 자식들의 지금 현재를 그냥 진정으로 바라봐주신다면 그동안의 상처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따뜻한 말도 필요 없고 고맙다는 말도 필요 없다.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진심으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바라봐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에게는 이렇게 쏘아붙이며 마음 아프게 했으면서 정작 나 자신은 타인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현재를 살고 있는가. 정말로 하루를 온전히 살았는가. 나는 가족을, 남편을, 친구를 과거의 내가 알던 그들이라는 편견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가.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 그런 건 못해, 라는 과거의 눈으로 나 자신을 단정짓고 한계 짓지는 않았는가. 


이 책 속에는 이런 사람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이 순간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저자는 '표현'한다. 그는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다. 수천 번은 와 본 곳인데도 매번 처음 온 것처럼 주의를 둘러보고, 누군가를 만나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을 때도 언제나 진심을 담으며,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눌 때면 진정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다. 그 사람의 그러한 삶의 방식이 '순간을 사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게 된다. 흔해 빠진 이 말을 내 가슴이 몰랐음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책을 읽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새로운 이상을 만들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다시 반성하고를 반복한다. 그렇게 나는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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